2월에 쓴 편지 / 한경선

 

 

 

 

잔설이 점점이 남아 있고, 귓불이 아직 시리지만 머리카락에 떨어지는 햇빛 알갱이들이 따사롭습니다. 발밑에서 서릿발이 아삭아삭 부서집니다. 겨우내 낮게 엎드려 버틴 어린 풀들을 봅니다. 풀잎 끝에서 비로소 반짝이기 시작하는 이슬이 보석 같습니다. 들판은 가슴을 활짝 열어 보이며 지나쳤던 작은 생명을 살펴보라 합니다.

주어진 몫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그들에게 갈채를 보내라 합니다. 계절이 오고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없었다면 산다는 건 또 얼마나 건조했을까요. 고단한 마음이 잠시 쉼을 얻습니다.

저기 밭두렁 가에 갓난아이 손처럼 고물거리는 아지랑이 좀 보세요. 소란하고 변덕스런 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럴 때 두근거리지 않을 만큼 튼튼하지 못합니다. 아지랑이 옆으로 가서 졸음에 겨운 고양이처럼 실눈을 뜨고 앉습니다. 검은 흙이 새삼 듬직해 보입니다. 봄을 잉태하여 만삭이 된 흙의 뱃살이 거미줄처럼 텄습니다.

살얼음 아래로 돌돌 흐르는 도랑물 소리가 들립니다. 방천 너머에 버들강아지가 눈뜰 채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실핏줄 뻗쳐오른 복숭아나무 가지가 발그레 곱습니다. 묵은 덤불에 쥐불이라도 놓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눈치를 챘는지 한 떼의 작은 새들이 낮게 후두두 달아납니다. 

술렁술렁 바람이 일기 시작합니다.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소리를 냅니다. 하얀 비닐 조각을 바람이 몰고 달아납니다. 옷을 다시 여밉니다. 질척거리는 흙이 신발에도 손수레 바퀴에도 자꾸자꾸 붙습니다. 두서없이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눈을 곱게 뜰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날들이 늘 산들바람만 불거나 고운 이슬비만 내리거나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이미 알기에 크게 탓하지 않습니다.

이런 날들이 없다면 당신을 그리워할 핑계 또한 앓게 될 것입니다. 눈 내리는 날 그랬듯이 바람 속에서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결에 풀잎 위에, 햇빛 속에 언제나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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