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발자크’, 1898년.

오귀스트 로댕은 58세 때 완성한 오노레 드 발자크 조각상 때문에 정치적 위기에 빠진다. 지금은 ‘가장 위대한 19세기 조각’이라는 평을 듣지만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주문자에게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민감한 정치 스캔들에도 휘말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글을 썼던 발자크는 51년의 생애 동안 1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기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이 됐다. 1891년 프랑스 문인협회는 발자크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조각상을 로댕에게 의뢰했다. 협회 신임 회장에 선출된 에밀 졸라의 추천 덕이었다. 로댕은 사전 조사 4년을 포함해 작품 완성에 무려 7년을 바쳤다. 발자크의 얼굴과 체형, 입던 옷뿐 아니라 성격과 생활 습관까지 연구한 끝에 최종 버전의 석고상을 1898년 살롱전에 선보였다. 작품을 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집필 망토를 걸치고 달빛을 쬐며 서있는 문인의 모습은 세부 묘사를 생략한 과감하고 거친 표현 때문에 눈사람 또는 두꺼비를 닮았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협회는 위대한 문인에 대한 경외심은커녕 모욕감만 들게 한다며 작품 인수를 거절했다. 동료 예술가들이 로댕을 돕기 위해 나섰다. 청동상 제작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외려 로댕을 더 궁지에 빠지게 했다. 모금 참여자 대다수가 드레퓌스 지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간첩 누명을 쓴 유대계 젊은 장교 드레퓌스 사건으로 양극으로 갈라져 있었다. 반유대주의 정서를 가진 보수주의자들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고, 진보적 지식인들은 무죄라며 맞섰다. 드레퓌스 반대파였던 로댕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로댕은 자신의 작품을 비난한 사람들과 한 편이 되는 길을 택했다. 작품 값을 반환한 뒤 조각상을 죽을 때까지 자택에 보관했다. 석고상이 청동으로 제작돼 세상의 빛을 본 건 로댕이 사망한 지 22년이 지난 후였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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