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광장에 알몸의 젊은 여자가 죽어 있다. 오른쪽엔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창을 든 병사가 그 앞을 엄호하고 있다. 배경에는 마을 사람들이 보이고, 땅에 내려앉은 비둘기 떼가 죽은 여자 주변을 맴돌고 있다. 도대체 이 여성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스페인이 로마제국 통치하에 있던 304년, 바르셀로나 인근에 에울랄리아라는 이름의 열세 살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귀족 집안 출신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무척 똑똑하고 당찬 아이였다. 당시 로마 황제는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수많은 가톨릭교도들을 탄압하고 죽였다. 에울랄리아는 이에 항의하며 당당히 맞서다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채찍질, 태형 같은 고문은 물론이고 옷이 벗겨진 채 유리나 못 등 뾰족한 것들이 잔뜩 든 통에 넣어져 내리막길을 굴렀다.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생기지 않자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녀가 숨을 거두자 하얀 눈이 내려 알몸을 덮어주었고, 입에서는 비둘기가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19세기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에울랄리아 이야기를 매우 대담하게 그렸다. 소녀의 주검을 화면 맨 앞에 수직으로 배치해 극적으로 짧아지게 했고, 풀어헤친 긴 머리와 알몸은 하얀 눈과 대조를 이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먼 배경 속에 그려 감상자의 시선을 어린 성녀의 몸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순교자의 몸을 선정적이고 관능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화가는 소녀의 알몸 일부를 피를 상징하는 붉은 천으로 덮었고, 그 주변은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떼로 감쌌다. 또한 병사가 든 창이 십자가를 향하게 해 소녀를 살해한 로마군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