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23 (목) 12:00:00 이리나 수필가
머리 위로는 분홍 라일락이 만발했다. 작은 꽃송이들이 혹여 떨어질세라 뭉쳐서 피는 꽃. 할아버지께서 나직이 말씀하신다. “벌 조심해야지. 라일락은 향이 세서 벌이 많아.” 정말이다. 의자 위로, 꽃 사이로, 윙윙거리는 벌의 날갯소리가 가득하다. 우리는 옆 벤치로 옮겨 앉는다. 왜 그날 거기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현기증이 날 만큼 황홀하던 그 향기와, 할아버지의 목소리만큼은 지금도 선명하다.
발길을 돌리니, 화단에 아이리스가 피었다. 흔히 보던 아이리스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내 주먹보다도 큰 꽃이다. 보라색과 노란색이 나란히, 보란 듯이 서 있다. 보라색 꽃잎을 보는 순간, 고흐가 떠올랐다. 고흐도 이런 아이리스 군락 앞에 섰겠지. 그리고 나처럼 한동안 바라만 보지 않았을까.
창날 같은 아이리스 잎사귀 사이로 나비 한 마리가 한가롭게 난다. 모나크 나비만큼 크지는 않지만, 집 주변에서 보는 나비보다는 크다. 이윽고 한 무리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닌다. 마치 동네 사람들이 이 집 저 집 마실 다니듯, 바쁘지 않게, 서두르지 않게. 하긴 여기는 이들의 집이다. 우리는 이 가든에 구경 온 나그네고.
그늘진 벤치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본다. 나비에게 목적지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그냥 꽃이 좋아서 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도 오늘 그랬다. 튤립을 보러 왔다가 라일락에 붙들리고, 그 향기에 이끌려 원주 기차역까지 다녀왔다가, 아이리스 앞에서 고흐 곁에 잠깐 서 있었다.
계획한 것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봄날 오후의 데스칸소 가든에서, 나도 잠시 나비가 되었으니까.
<이리나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