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라, 봄바람>

                                                                                                                                                  추선희

 

  좋거나 싫은 것을 줄 세우던 시절이 있었다. 추상이든 구체든 제일 좋아하는 것,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 등으로 정해두고 마음에 품거나 타인에게 드러내곤 했다. 제일 싫어하는 것을 언급할 때는 살짝 몸서리도 쳤었다. 선택의 자유와 냉소가 범람하던 때였다.

   싫어하는 계절로는 봄이 으뜸이었다. 차분하게 아름다운 가을이 제일 좋았고 냉기와 온기를 넘나들어야 하는 겨울도 나름 매력적이었다. 더위를 탔지만 휴식과 동의어인 여름에게는 우호와 미움이 반반이었다. 봄은 왜 미움을 받았을까. 햇살도 따습고 새순과 꽃을 피워 올려 세상을 환하게 하는데 말이다. 주범은 바람이었다. 훈기가 배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풍이 반갑다기보다 싫었다. 봄바람은 방향과 속도, 강약을 순간순간 변경하면서 겨울동안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들쑤셨다. 특히 가늘고 힘없는 내 머리칼을 헤집어 산발을 만들고 뺨과 이마를 때리듯 거칠게 스쳤다. 봄볕에 속아 치마라도 입은 날이면 제멋대로 파고드는 바람 때문에 종일 고단했다. 통제를 벗어난 머리칼과 옷자락 때문인지 마음도 따라 헝클어졌다. 바람이 잦아들고 봄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좋아했던 사실을 후회하고 싫다가 좋아지는 일이 잦아진다. 좋든 싫든 순서를 매기는 것은 부질없는 오만이었다. 봅도 언제부턴가 편해지더니 점점 반가워졌다. 바람이 싫지 않게 된 덕이 제일 크다. 바람이야 그제나 이제나 상하좌우 제 마음대로 놀지만 밉지가 않다. 흙먼지를 일으키고 새순이 달린 나뭇가지를 흔들고 깃발을 갖고 노는 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바람 줄기에 고갱이처럼 들어 있는 온기가 고맙고 속절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이것저것을 보는 게 유쾌하다. 머리칼과 옷자락을 헤집는데 화나지 않는다. 여간한 일에는 꿈쩍하지 않는 마음을 알아채고 나니 더 그런 듯하다.

   근자에 지진이 연거푸 발생했었다. 첫 지진 때는 저녁을 먹고 동네 학교 운동장을 도는 중이었고 두 번째는 서재에서 베이스를 퉁기고 있었다. 딛고 있던 땅이 별안간 움찔했고 서재가 통째로 흔들렸다. 지진임을 알아차리자마자 흔들림은 멈췄고 나는 그 몇 초 전 하던 일을 이어갔다. 마음이 별로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다시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운동장으로 모여들어 불안을 나누던 사람들이 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 다음 지진 때도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어서 베이스 연습을 계속했다. 곧 리듬을 되찾았다. 예상외로 침착한 자신이 대견스러웠으나 뜻밖의 반응이 어색하기도 했다. 이런 태연무심이 평정심인지 체념인지, 고요인지 비관적 수용인지 모르겠다. 한 줄기 서글픔이 일었는데 단단하면서 푹 익은 허무도 약간 섞여 있었다.

   혹시 때 이른 평정심에 대한 저항으로 새삼 봄에 호의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바람 때문에 싫어했던 봄이 바람 때문에 좋아졌기에 그리 짐작해본다. 들쑥날쑥한 만남과 이별, 적응과 반항으로 거칠게 버무려진 그 시간과 봄바람은 많이 닮아 있었다. 새파란 꿈과 열기, 불안과 강박을 견디며 겨우 버티는데 종잡을 수 없는 바람까지 가세하니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지진이든 이별이든 오해든 상처든 겉으로야 그리 흔들리지 않는다. 잠깐 휘청대다가도 큰 숨 한번 쉬고 나면 제자리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생의 봄이 지나가 버리니 오히려 들뜨고 어수선한 봄날이 좋아지고, 흔들리지 않으니 흔드는 것이 그립다. 평정심이 덜 익은 탓이라도 상관없다.

 

  봄바람아, 불어라.

너만이라도 나를 흔들어라.

아직은 나를 흔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