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행복을 만든다 / 버트런드 러셀
나는 행복한 사람들이 지닌, 가장 일반적이고 뚜렷한 특징인 열정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열정의 본질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행동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식사를 지루한 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식탁에 아무리 훌륭한 음식이 놓여 있어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훌륭한 음식을 먹어본 경험이 있거나, 어쩌면 끼니마다 훌륭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배를 곯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본 적이 없으며, 식사를 그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관습이 강요하는 의례적인 행사로 여긴다. 이들에게는 이것저것 모두 귀찮듯이 식사도 역시 귀찮은 일이다. 식사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것 역시 귀찮기 때문에 이들로서는 공연한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
반면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지시 때문에 의무감에서 식사를 하는 환자들이 있다. 다음에는 미식가들이 있는데, 이들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식탁에 앉았다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만큼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이번에는 대식가들이 있다. 이들은 게걸스럽게 음식에 달려들어 과식을 하고 나서, 잔뜩 부푼 배를 끌어안고 코를 골며 잠이 든다. 마지막으로 적당히 식욕을 느끼고 식탁에 앉아 맛있게 먹다가, 배가 적당히 부르면 수저를 놓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이라는 잔칫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역시 인생이 내놓은 유익한 것들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행복한 사람은 적당한 식욕을 느끼고 적당한 양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과 비슷하다.
식사하는 태도와 배고픔의 정도가 관련이 있듯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열정의 정도와 관련이 있다. 식사를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낭만적인 불행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람과 비슷하다. 의무감에서 식사를 하는 환자는 금욕주의자와 비슷하고, 대식가는 방탕한 사람과 비슷하다. 미식가는 인생이 제공하는 즐거움의 절반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고 푸념하는 까다로운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대식가들은 예외인 경우가 있지만, 모든 유형의 인간들이 건강한 식욕을 가진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배가 고파서 식사를 하거나, 여러 가지 재미있는 볼거리와 신기한 경험을 찾아서 인생을 즐기는 태도를 천박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득도를 한 듯 고고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자신들이 경멸하는 사람들을 단순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멸시한다. 나는 이런 견해에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득도를 한 듯이 행세하는 태도야말로 큰 병이다. 물론 어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런 병에 걸렸으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치료를 해야지, 자신의 지혜가 더 우월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딸기가 유익하다, 혹은 유익하지 않다는 일반적인 이론의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딸기는 유익한 것이고,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딸기는 유익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맛보지 못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만큼 이 사람의 인생은 더 즐거운 것이고, 두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더 적합한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다.
-출처 『행복의 정복』(버트런드 러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