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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시집『뿔』(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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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KTX 개통 11년을 맞았으니 이 시에서의 ‘특급열차’란 시속 3백 킬로미터를 주파하는 KTX는 아니고 아마 ‘새마을’쯤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특급’이란 칭호는 오랫동안 ‘통일호’열차에 친숙하게 붙여진 등급이어서 어쩌면 지금은 퇴출된 그 ‘통일호’를 지칭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통일호가 씽씽 달릴 때는 ‘우등’인 무궁화호 보다는 한 끗발 밀리지만 분명히 ‘보통’인 비둘기호 보다는 속도 면에서 우위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특급’과 ‘보통’ 사이에 ‘보통급행’이란 등급의 열차도 있었던 것으로 흐릿하게 기억된다.

 

 어쨌거나 속도전의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에서 돌아보면 격세지감이 아니 들 수가 없다. 거침없이 ‘탄탄대로’를 달리며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한 ‘승승장구’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겐 과거의 느려터진 답답한 교통수단들인데, 시인은 그마저도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고 한다. 목적지만을 향해 질주하는 속도에 마비될 게 아니라 발이 부르트도록 종일 느리게 걸으면서 느긋하게 둘레의 풍경들에 감동할 것을 권한다.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는 여유로운 삶의 회복을 제안한다.

 

 꼭 특급 열차 안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날아가듯 달려가’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같은 풍경과 말들’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목적 달성을 위한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뛴다고 하여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아무 곳에나 떨어져 몸을 묻은 곳에서 피어나는 풀씨들이 저토록 푸른 산을 이루고 강물은 저리도 반짝이는데 내 삶은 무어냐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란 대체 무엇이고, 과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얼까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바삐 살면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없는지, 지나치고 외면했던 살가운 존재들은 없었는지 떠올려 본다. 중환자병동에서의 눈물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들에게서 듣는 하나같은 공통점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건만 정작 중요한 무엇을 잊고 살았다는 고백이었다. 그것은 내일 바로 우리들의 고백일 수 있다. 부모가 철없는 아이를 가르칠 땐 회초리를 사용하지만 신이 인간을 가르칠 때는 세월을 통해서라고 했던가. 이윽고 목표를 지워버리고 그 과정을 중요시했던 생각마저 던져버린다.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