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자원고지,80매                                  60(耳順)

 

 

 나 같이 조국을 떠나 오랫동안 해외에 사는 디아스포라에겐, 고국 방문은 꿈결 같은 것이리라. 특히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내가 활동했던 곳, 여기저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을 추억이라 할 수도 있고, ‘흔적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내 나라를 떠난 지 30여 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단 두 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1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고, 이번은 내 지기 진석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진석과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짝꿍이었다. 그는 읍내 부잣집 아들이었다. 토요일마다 그의 집에 놀러 가면 진석 어머니는 엄마처럼 나를 대해 주셨다. 이 학년 때 그는 이과로, 나는 문과로, 헤어졌지만 삼 년 내내 붙어 다녔다. 대학도 서울에 있는 같은 대학에 진학했을 정도였다, 그는 물리학과, 나는 국문과. 삼선교에서 자취를 같이했고, 진석 어머니는 내가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걸 알고, 황송할 정도로 밑반찬이며 마른 생선 같은 것을 하루가 멀다고, 소포로 보내오셨다.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고 명절 때면 진석이네, 집에 들러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택시는 유명한 대학부속병원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건물이다.

 난 육십 평생 병원을 가본 적이 없다. 본래 약골인데도 병원 갈 만큼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병원에 이박삼일 입원했던 적이 있다. 아주, 아주, 오래전......

 내가 대학교 이 학년 때, 법적으로 20세가 되던 날 처음 한 일은 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뇌사 시 장기기증, 사후 각막기증, 골수 기증을 서약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면 제일 먼저 할 일을 생각해 두었다 한 것이다. 무슨 거룩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몹시 감상적이던 국문과 학생의 염세적이랄까, 짙은 허무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정말 인류애, 동포애, 공동체 의식, 같은 건 아니고 기왕이면 좋은 일 하자라는 취지였다. 물론 운동권 친구 진석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하여튼 이 병원애서 골수기증을 했다.

 

 비비안(세례명),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입학 후 보름 정도 있다가 시골집에 다녀오던 장항선 열차 안에서였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다니셨는데,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다.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에 급히 내려갔다 오는 중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에 타박상 입은 것 말고는 큰 부상이 없으셨다.

 쌀쌀한 봄날 일요일 정오쯤 기차가 플랫폼에 서자마자 잽싸게 뛰어올라 탔다.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이 없는 편이었다. 기차표의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를 잡았다. 중간쯤이었다. 역시 넓은 기차 안도 붐비는 편이 아니었다.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할 때 앞에서 약간 큰 키의 젊은 여자가 기차표를 보고 자리를 확인하더니 내 옆으로 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유난히 희고 갸름한 얼굴, 옅은 화장, 밝은 미색 원피스 위에 감청색 긴팔 재킷을 입은 모습이 어찌나 우아해 보이던지, 백합화 같았다. 이미지가 잉글릿드 버그만 같이 지적이었다.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던 그 모습은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녀가 내 쪽에 당도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어른에게 절하듯 꾸벅 인사를 했다. 그녀는 의외로 환하게 웃어주었다. 말이 대학생이지 고삐리 티도 벗지 못한, 땟국물 좔좔 흐르는 촌놈이 어른에게, 습관적으로 인사하는 순진한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였으리라. 말도 못 붙일 것같이 세련되고 이지적인 모습과는 달리 소탈했다. 미소를 머금은 채그녀가 물었다.

 “한천 고등학생이에요,?” 

 “아니요, 대학생입니다. 민국대 국문과. 입학한 지 보름 됐습니다.”

 “어머나, 내 후배시네, 나는 미대 서양화과 졸업했어요. 이런 인연이 있나!”

 진짜로 반가워하는 말투였다.

 그녀는 마침 홍익회 매점 카트가 지나가자 캔 커피 두 개를 사서, 하나는 나를 주고 하나는 자신이 마시면서 우리 얘기는 이어져갔다. 커피를 건네는 손, 검지에 묵주반지가 정결하게 끼워져 있었고, 가는 손목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푸른 정맥은 변하지 않는 생명의 신비 같았다.

 비비안, 그녀 또한 한천 읍내 외할머니 병문안을 하고 오는 중이었다. 엄마가 중학교 선생님이고 아버지는 회사원이어서,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자기를 키워주어서, 지금까지 각별하다고 했다. 태어나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까지 한천 외가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 모르게 엄마는 어렵고 외할머니는 편하다고 했다.

 외갓집이 가톨릭 집안이라서 외할머니가 성당에 봉사를 많이 하셨는데, 자기는 주로 성당에서 놀았다고 했다. 진석이네, 집에 갈 때 그 성당 옆을 지나가야 하므로 나도 눈에 익은 교회당이다.

 “신입생이고 개강 초라 무척 바쁠 텐데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이런, 괜찮아요!”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불행 중 다행으로...”

 그리고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누구나 부모님은 소중하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특별한 분이에요. 어머니,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갈 무렵 돌아가셨어요. 우리 집은 아들만 둘인 단출한 집이에요. 제 위로 3살 많은 형이 있는데, 올해 한천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어요. 제가 막 대학생이 된 것처럼, 형은 막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거죠. 아버지는 재혼도 안 하시고 우리 형제를 키웠어요. 당신께서 도시락도 싸주시고, 집안 살림도 하시면서 면사무소에 다니셨어요. 그래서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답니다.”

 교대에 가면 군 면제라는 특혜를 주었다. 아버지 권유로 형은 교대에 갔고 2년 졸업 후 고향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읍내로 출퇴근한다. 형은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하고 운동도 잘해서 육사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에, 자기라도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꿈을 접고 교대에 갔다. 그 점이 형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나는 형 덕분에 대학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로 또, 자유롭게 국문학을 전공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일로 아버지보다 형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그녀의 표정은 슬퍼하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난 크게 웃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예요.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막막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어요. 자꾸만 슬퍼져 잠도 안 오고 무얼 먹고 싶은 생각이 영 들지 않았어요. 더구나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이런 나를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돌본 탓에 저는 조금씩 움직이고 잠도 자고 먹기 시작했어요.”

 이때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바람에 입술을 악다물었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마음이 약한 건지, 인정이 많은 건지, 감성 지수가 높은 건지, 난생처음 만났는데도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준 것이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따스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안 사실이지만 그게 무기력증이란 걸 알았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날 때 어머니의 부재는, 내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영혼의 고향이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나는 춥고 외로웠지만 어머니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었다.

 엄마 품, 엄마 냄새, 엄마 눈웃음, 이런 게 미치도록 그리울 때면 하염없는 마음에, 모든 어미는 어린 새끼를 놓아두고 먼저 가면 안 된다는 당위가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물론 어린 새끼 세상에 던져놓고 떠나갈 수밖에 없는 어미의 심정 형언할 수 없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어미는 일찍 가면 안 된다는 당위성은 내가 독신주의자가 되게 했다. 결혼해서 자식들에게 본의 아니게 나와 같은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너무 확고했다.

 

 그러니까 내 나이 19, 그녀 나이 34살에 우리는 만난 것이다. 나이가 나보다는 열다섯 많았고, 남편은 검사였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검사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무서운 사람이란 걸 모르던 촌놈이었다. 내 친구를 잡아가는 무시무시한 공안검사란 게 있는 것도 모르던 촌놈이었던 것이다.

 남편과 사이는 매우 좋으나, 결혼 7년 차지만 아이가 안 생겨 은근히 걱정이란 말까지 했다. 남편하고 둘이 재미있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말하자 피식 웃었다. 진짜로 남편이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미술 하는 사람들은 다 알만한, 규모가 큰 화방을 운영했다. 시아버지가 일군 건데, 갑자기 암 수술하는 바람에 미대 출신인 그녀에게 운영을 맡겨서 하는 일이었다. 남편이 외아들이라 자기네가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고 3년 차라고 했다.

 비비안, 그녀는 나를 동문이라 반가워했고 또, 내가 국문학 전공이라 하자 자신도 글쓰기를 매우 좋아한다며 반가워했다.

 서울역에 도착할 거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여행객들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는 챙길 짐이 딱히 없었다. 그녀가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주며 말했다.

 “시간 나면 연락해요, 아니, 한번 놀러 와요. 우리 매장에

 “정말요

 나는 황송했다. 생각지도 못한 호의였다.

 “편지해도 돼요?”

 나는 들뜬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요, 얼마든지. 우리 고향 사람인데.”

 그녀는 한천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난 그다음 날부터 정말이지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감정 과잉이던 국문과 학생에겐 그까짓 편지 몇 장 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정녕코 그녀는 나의 뮤즈(Muses)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의 우상이였다.

 처음 편지는 짧았다. 때꼬장물 줄줄 흐르는 촌놈을 상대해 주셔서 고마웠다는 것과, 내 이야기를 깊이 공감해 주셔서 감사했다는 것과, 그녀의 인상에 관해 썼던 것 같다.

 

 본래 국수를 안 먹었는데, 학교 구내식당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국수를 먹어봤다는 둥, 하찮은 일부터 미주알고주알 그날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쓰곤 했다. 심지어 문학의 기능이 어떻고, 원형상징이 어떻고, 수업 시간에 배운 얘기도 썼다. 그녀도 짧게든, 길게든, 꼭 답장을 해주었다.

 촌놈이 서울에 왔으니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글 쓸거리가 많았다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편지로 옮기는 게 좋았다. 난 참으로 편지 쓰기 자체를 즐겼고, 학교 우체국 사람들이 나를 다 알 정도였다. 매일 편지를 부치고 편지를 받으며 이 년이 흘러가는 동안전화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내가 비비안에게 했고, 실제로 만난 건 몇 번이 안 된다늘 편지하고 가끔 통화를 하다 보니 우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고향의 아버지와 형에게도 편지를 자주 하는 편이었다. 국문과생이라 뭔가를 끄적거리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형은 답장을 꼬박꼬박해주었지만, 아버지는 딱 한 번 답장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유선전화만 있었지, 핸드폰이 없었다. 유선전화도, 흔하던 시대는 아니었다. 느리지만, 편지가 지금의 핸드폰 문자 메시지 역할을 대신하던 시대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녀와 내가 남달랐다면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다. 편지는 전화보다 훨씬 더 내면적이다. 그래서 우린 누구보다도 깊어질 수 있었으리라. 전화란 기계로 연애하는 지금 세대들은 잘 이해 못할 것이다.

 한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을 하자마자 나는 고향 아버지께로 갔지만, 진석은 서울에 남아 동아리 사람들과 공부한다고 했다. 나는 방학 내내 시골집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조지 오웰의 “1984”,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완독하였다. 물론 이때도 그녀에게 편지는 계속되었다. 내가 고향에서 편지를 주고받을 때쯤은, 우리가 많아 가까워져 있었다. 아마도 내 꾸준함과 한결같음이 그녀가 마음을 여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편지라는 통신수단은 느리지만, 사람과 사람의 심리적 거리는 빠르게 좁혀주는 도구였다.

 

 이 학기가 개강하고 나서, 얼마 있다 비비안이 내가 보고 싶다며 만나자고 했다자기 화방으로 점심시간에 맞춰 오라는 거였다.

 비비안이 화방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건너편 이층에 있는 경양식집으로 데리고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이거 얼마 만에 얼굴 보는 거지.”

 이미 비비안은 내게 반말할 정도로 우린 친숙해져 있었다.

 “삼월에 보고 시월에 보니 딱 칠 개월 만에 보는 거네요. 더 예뻐졌는데요.”

 진심이었다. 나도 너무 반갑고 기뻤다.

 “, 이젠 완전 대학생티가 나는데. 세련된 서울 학생 같아. 그 여학생이 아직도 따라다녀?”

 “아이고 왜 이러세요.”

 일 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데 집이 부산인 우리 과 여학생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해 따라나섰다. 학교 구내식당에 가려니 했는데, 교문 밖 경양식집으로 갔다. 난 경양식집은 난생처음이었다. 돈가스를 사주는 거였다. 그리고 우리 사귀자고 했다. 그래서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매일 있었던 일을 편지에 쓰니 비비안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소리였다.

 돈가스가 나왔다.

 “내 생애 두 번째로 먹는 돈가스인데요

 아까 농을 데 갚아 주었다. 비비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이 학년을 마친 후 군대에 갔다. 그러나 군, 입대 시기는 비슷하나 내 친구 진석은 운동권 핵심 구성원으로 찍혀, 강제징집을 당해 GOP 남방한계선 철책선 군무를 하게 되었다.

 나는 군대에 가서도 자대 배치 후엔 어김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자대 배치 후 몇 달이 지났을 때 말도 없이 그녀가 강원도 원통까지 면회를 왔다. 난 믿을 수가 없어서 진짜로 내 볼을 때려 보았다. 얼마나 신났는지 엄마 돌아가신 후론 최고로 밝게 웃었던 것 같다. 일부러 나 놀라게 하려고 연락 안 하고 왔다고 했다.

 외박을 나온 그날 밤 그녀가 내 품에 먼저 안겼는지, 내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는지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밤새도록 하나였다.

 휴가 나올 때 시간을 아버지에게 다 내 주지 못해 죄송스러웠다. 그녀 또한 내 휴가를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게 이상해서,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서로 바빠서 만날 궁리를 안 했고 그래도 상관없었는데, 군대에 가니 서로가 보고 싶어 했다. 언제든지 불 수 있을 때는 안 보고, 볼 수 없게 되니 보고 싶은 심사는 무엇인가.

 제대 후 삼 학년 복학 후에도 나는 여전히 편지를 썼고, 그녀도 답장했다. 군대 가기 전과 제대 후 달라진 게 있다면 가끔, 그녀가 내 자취방에 온다는 것 말곤 달라진 건 없었다.

 진석은 제대 후 복학 대신 재수를 했고, 미대에 진학했다. 본래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집에서 반대해 못하다가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미대 졸업 후,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하고, 일본에 유학 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미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를 한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모르겠다.

 그와 삼선교에서 이 년간 자취하는 동안 행복했다. 시대는 군부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학내 시위가 끊이지 않았지만, 어느 땐 최루탄 가스가 교실까지 들어와 수업을 못 하는 날도 제법 있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인생은 지나가고 있었다.

 둘 다 연극을 좋아해서 자주 혜화동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봤다. 삼선교에서 혜화동까지 언제나 걸어 다녔다. 연극이 끝난 후 돌아올 때면 중간에 있는 혜화동 성당에 들러, 성모마리아상 앞에 서서 가슴을 치며 메아 쿨파”(내 탓이오), 메아 쿨파”(내 탓이오)를 외쳤다. 누가 보면 우리가 대단한 가톨릭 신자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나는 지금까지 어떤 종교도 가져 본 적이 없다. F.M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들었던, 에디 띠 피아프(1915-1963)의 애절한 샹송 메아 쿨파을 기억했다. 일종의 장난 비슷한 거였다. 그러나 성당 분위기를 좋아하는 측면도 없잖아 있었다.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여, 첫 돌을 나에게 던져라. 사랑한 적이 없는 이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거절하라노래에 나오는 가사 중 일부다.

 최근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종교가 인간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진화 발전해 왔다는 게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믿든 안 믿든, 우리 모두에게 종교적 심성이 있는 게 우연이 아니란 얘기 아닌가.

 대략 대학 입학 한 달 후, 두 촌놈이 최초로 본 연극은 고도를 기다리며. 시쳇말로 뭐 좆도 모르고 본 연극이다. 우리는 이 연극을 보고 나와 대갈빼기를 감싸고 길바닥을 때굴때굴 굴렀다. 머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도대체 뭘 얘기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국문과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이지만, 연극적 지식이 있어야 볼 수 있는 유명한 연극이었다. 매우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며 철학적인 연극을 이야기만 쫓아가는 연극으로감상하려고 했으니 머리가 깨질 수밖에.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그 끝없는 기다림 속에 나타난 인간존재의 부조리 성을 보여주는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부조리극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부조리극은 실존주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의 존재가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고 모든 소통이 붕괴할 때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시작부터 제일 어려운 연극을 보았으니, 그다음 연극부터는 어려울 게 없었다.

 

 진석과 나는 모든 것을 다 말하는 사이였지만, 비비안에 대해선 입 뻥끗도 안 했다. 그도 내 눈치를 알고 궁금해하면서도 묻지 않았다내 뜻을 존중해 줘 고마웠다난 비비안을 세상에 발설하면 신성함 같은 게 훼손되는 것이라 믿었다.

 난 촌놈 중의 촌놈이라면, 진석은 미술을 좋아해서 그런지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다. 물리학과 학생이 일본 패션잡지 논노(non-no)를 정기구독할 정도였다. 일종의 부르주아 기질이 다분했는데 운동권 핵심 구성원이 되었으니, 사람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운동권이 안 된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 본래 말씀이 없으시지만, 서울에 올라오기 전날, 내게 당부했다. 만약 네가 데모하다 붙잡혀가면 아버지, , 신분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자중하라는 말씀이셨다. 아버지는 하급 공무원이었고, 형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초임 교사였다.

 그러나 난 시위 현장엔 얼씬 안 했을 뿐, 리얼리즘(사실주의) 문학 이론을 공부하다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1885~1971.헝가리.문예사상가)를 읽었다. 또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 푸고(1926~1984.프랑스)를 알게 되면서 아나키즘(anarchism,無政府主義)에 빠지게 되었다. 아나키즘의 비판 대상은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자본이나 종교 등에도 미치며,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지배를 부정하고 의문에 부치려는 사상 조류이다.

 비비안도 나와 같이 아나키즘을 좋아해 주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부터 시작해서, 내 지적 성장을 나의 뮤즈 비비안은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아니 함께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기록(편지)으로 남아있음으로) 그녀는 내가 하는 모두를 응원해 주었다.

 

 대학 삼 학년도 끝나가고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나와 유전자형이 일치하는 환자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 나와 맞는 골수를 가진 사람이 나타났는데 골수를 기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난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라고 정확하고 천천히 대답했다. 전화한 담당자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감사하다고 인사를 되뇌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기증 후 알고 난 사실이지만, 골수기증 신청인들이 후에 기증요청을 받고는, 취소하는 확률이 70%나 된다는 것이었다.

 골수기증 방법에는 '말초혈 채취방식''골수 채취방식' 두 가지가 있다. 내가 기증한 방식은 골수 채취방식이다. 골수(조혈모세포)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이 엉덩이뼈이기 때문에 엉덩이뼈 속에 있는 골수 액을 주사기로 뽑는 방법이다.

 상세하게 설명하면 전신마취 후 골반 뼈에 주사기를 삽입해 채취하는 방식으로, 채취 1~3주일 전 자가 수혈을 위한 혈액을 헌혈한 뒤 채취 후 수혈받게 되는 것이다. 채취일 4주 전부터 종합건강검진, 자가혈 채취보관 등의 과정을 미리 한다. 조혈모세포채취 하루 전에 입원하여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고 저녁부터 금식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수술실로 이동하여 전신마취 후, 엎드린 자세에서 엉덩이뼈 속에서 채취용 주사기로, 1회에 수 ml씩 약 1~2시간에 걸쳐 골수 액을 뽑는다. 조혈모세포채취량은 환자의 사정과 기증자의 건강 상태에 따라 약 800~1,200ml를 채취하고, 동시에 빈혈 등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자가혈을 수혈받는다. 조혈모세포채취 후 입원실로 돌아와 지혈을 위해 약 3~4시간가량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며,(이때 기증자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간병인을 둔다. 그러나 나는 혼자 했다.) 또한 마취가 풀리면서 채취 부위에 통증이 다소 있을 수 있으나, 진통제를 투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훨씬 좋아진다. 일반적으로 조혈모세포 공여자는 당일 저녁부터 활동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채취 다음 날 퇴원하므로 병원 입원 기간은 23일을 필요로 하고, 퇴원 후에는 무리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활동할 수 있지만, 조기 회복을 위해 약 1주일 이상의 특별휴가를 사용하도록 권장한다. 조혈모세포를 체취하고 나면, 2~4일 정도 뻐근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금방 일상생활에 복귀할 수 있다. , 채취하는 조혈모세포는 몸 전체의 극히 일부이고 조혈모세포는 2~3주 이내에 원상회복되므로, 공여자의 건강과 조혈모세포 기능은 저하되지 않는다. 헌혈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학기 중이 아니라 수업에 전혀 지장이 없는 방학 때 기증하게 돼서 부담 없어 좋았다. 나와 맞는 골수를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이 대략 만분의 일 정도라 하는 데 이 얼마나 특별한 인연이란 말인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기증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한 생명에 대한 오롯한 헌신일 것 같았다.

 

 일요일 점심 때쯤, 내 자취방에 비비안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얼굴이 창백하고 초췌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불을 덮고 있다 일어난, 부스스한 내 모습을 보고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엔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어디 아파?

 “아뇨.”

 “그런데 왜 이래?

 소리는 못 지르지만, 화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 어제 골수 기증하고 오늘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왔는데 잠이 와서 잤어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뭐야! 왜 내게 말을 안 했어?

 깜짝 놀란 그녀는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맥없는 음성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골수 기증! 말만 들어도 간단한 것 같지 않은데 왜 나한테는 말 한마디 안 했냐고! 내가 민준이 걱정하느라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알아? 누구 죽일 작정이야? 매일 편지하던 사람이 일언반구도 없이, 일주일간 편지 한 장 없으니 내 속이 어떻겠냐고! 나는 민준이 편지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민준이 편지 없으면, 아니 민준이 없으면 나는 이제 못살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도대체 뭐지? 민준에게 아무런 의지도 될 수 없는 허깨비!”

 기운이 없으면서도 그동안 참아왔던 원망과 분을 쏟아내고 있었다단단히 화가 나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일단 들어오세요. 들어오지 않고 방문 앞에 서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들어와서 제 변명도 들어보세요, 그리고 나 수고했다고 안아주면 안 돼요.”

 나는 사정을 했다.

 “싫어! , 가겠어.”

 나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잡고 품에 안았다.

 “미안해요, 잘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의지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허깨비처럼 내 품에 쓰러지는 그녀를 안고, 속삭이는 나의 목소리에 갑자기 물기가 어렸다그야말로 나의 청춘은 오르지 그녀뿐이었다어떤 여자도 있을 수 없었다무엇보다 나의 모성결핍을 완벽하게 채워주던 사람이다. 가정 있는 사람이라 늘 죄스러웠다. 그녀는 위험 부담을 안고 나를 사랑해주었기 때문이다.

 

 진석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셨다. 호상이라 다른 상갓집과는 달리 분위기가 무겁지만은 않았다. 장례를 치른 며칠 후, 진석이 머리를 식힐 겸 길상사에 가자고 했다.

 차가 삼선교 한성대입구역을 돌 때, 나폴레옹 빵집이 보였다. 옛날, 진석과 내가 자취할 때 늘 지나쳤던 곳인데 반대편 새 건물로 옮겨져 있었다.

 진석이 재수하러 떠난 후, 자췻집에 비비안이 들를 때면 언제나 나폴레옹 빵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밤식빵과 소보루빵을 사 왔던 게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이 고해의 바다인 줄 모르던 시기였다.

 

 대학 4학년 일 학기가 끝나갈 무렵, 비가 내리던 토요일 오전, 비비안이 내 자취방에 왔다. 피곤해 보였다.

 “어디 아파요?”

 “아니

 “그런데 왜 안색이 안 좋아요.”

 “그런가

 뭔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무슨 일 있어요?”

 머뭇 머뭇거렸다.

 “, 임신했어. 지금 산부인과에 다녀오는 길이야.”

 ! 뭐라고요.”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얼마 동안을 멍하니 서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한 말이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왜 말도 안 돼, 민준이도 내가 생리통 있다는 것 알잖아. 나는 현재 가임기 여성이라고.”

 “그게 아니라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알아, 알아. 민준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의 임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결혼 후 한 번도 피임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정말이지 나는, 그녀의 임신이 뜻밖이었다.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그녀의 임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그건 우리의 관계상 임신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의외로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남편과는 정서적 공감대도 없고, 감성적 교감을 할 수 없어도, 이 사람 자체가 워낙 나를 좋아하니까 싫지는 않아. 그러나 반대로 민준이는 같은 고향 사람인지 몰라도 정서적으로 공감대가 잘 형성되고, 우리 둘 다 예술 쪽을 전공해서인지 감성적 교감이 잘 되잖아. 그래서 지금은 내가 일방적으로 민준이를 더 좋아하잖아. 내 말이 틀려, 맞아.! 대답해 봐?”

 “맞아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나를 너무도 사랑했다.

 “그래서 말인데, 민준이는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말이 돼.”

 “무슨 뜻이죠?”

 “내 배 속의 아이가 싫지 않은 사람아이건,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아이건 내겐 관계없다는 말이야.

 “아이를 낳겠다는 건가요.”

 “

 내 당혹스러운 질문에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비비안은 대답했다.

 “내 삶의 주인은 신도, 부모님도, 남편도, 민준이도 아니야. 내 삶의 주인은 오직 나야. 이건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절대 자아의 절대 결정권에 관한 문제야. 모든 건 내가 책임지고 내가 감당해.”

 크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너무도 단호해 목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결정적 증거는 없지만 그녀의 임신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확신했그녀는 벚꽃이 활짝 피었을 때부터 내게 콘돔 사용을 하지 말라고 했었다.

 난 출산은 안된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며 나에게 애원했다.

 “정당한 것이 아니잖아요.”

 “도덕이나 관습이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잖아.”

 그녀는 꼿꼿하게 맞섰다. 나도 지지 않고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맞섰다.

 “민준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은 어디 갔지? 이건 민준답지 않은 구태의연한 모습 아닌가? 아나키스트의 허무주의, 자유주의자의 풍모는 어디 갔냐고

 비비안은 급기야 나에게 처음으로 야유하며 힐난했다. 출산한다는 것이었다. 남편 아이든 내 아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관계는 끝이 났다.

 

 비비안은 정도 많고 심성도 여리지만, 자기가 마음먹으면 굽히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다. 출산한다는 그녀의 결정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하늘이 갈라놓지 않는 한 우린 헤어질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도, 서로 잘 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우리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지금까지도 충분히 길었다.

 떠나야 한다. 비비안과 태어날 아이를 위해 내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떠나야만 한다는 결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며칠을 식음 전폐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를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과, 내 의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하는 아픔은, 어느 것 하나 다르지 않고, 생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찌어찌하여 나는 그녀가 찾을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그 후 우린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전연 모른다.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돌이킬 수 없지만, 진석은 이름만 대면 비비안이 운영했던 화방을 알 것이다. 같은 업계라 해도 무방하다.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면 근황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지연, 학연으로 좁은 사회 아니던가.

 

 대학부속병원 건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만 내 나이 만 24세에 왔던 병원을, 다시 60(耳順)에 지나간다,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바로 60, 즉 이순이라 하지 않았던가.

 비로소, 그녀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딸이든, 아들이든,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랐을 것이다. 나이도 이제 삼십 중반으로 접어들 것이다.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일익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어떤 경우라도 사실이 존재보다 먼저일 수는 없다.

 때론, 인생이란 진실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는 법, 그래서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