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lington Park에서

 

 

 햇볕은 따사로운데 공기는 쌀쌀하기까지 한 청명한 대낮, 거의 다 읽어가는 리처드 토킨슨의 , 만들어진 위험을 곱씹으며, Arlington Park을 느릿느릿 산책한다.

 내 앞을 활기차게 지나치는 전형적인 서양 아가씨들, 하나는 스포츠 브라에 레깅스 차림, 한 명은 딱 맞는 청바지에 배꼽티를 입었다. 평소 같았으면 섹시하다는성적 에너지를 확 느꼈을 텐데, 오늘은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마냥 부럽기만 했다.

 얼마나 건강하면 저런 차림으로 이 싸늘한 바람도 거뜬히 견디며 활력 넘치게 걸을 수 있을까. 으레 젊은 여성들에게 느꼈던 성적 매력은 어디 가고 오직 생명력 자체만 부럽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관능미가 먼저였을 텐데 건강미만 부각 되었다는 말이다. 처음 있는 일이라서 스스로 생경하고 당혹스러웠다. 내 비록 육십 중반이지만 아직 남성성이 살아있는데, 내가 늙었다는 말인가?

 

 뇌과학을 자세히 공부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느낌이 직관적이라면 생각은 사유의 영역 같다. 느낌이 감각적이라면 생각은 추상적인 그것 같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라면 일차원적이기에 즉각적이고 잘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반면 사유나 추상의 세계는 고차원적이기에 간접적이리라. 느낌은 단순하기에 한결같지만, 생각은 복잡하기에 가변성이 많은 것 아닌가. 그런데 느낌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놀라웠다. 아름다운 꽃이 창창한 식물로만 보였다면 이해가 쉬울까.

 

 종교는, 신은 느낌에 가까울까? “생각에 가까울까?

 어떤 종교든 학습의 산물이다, 고로 어떤 신도 학습의 결과물이 아닐까? 경전은 신이고 신은 경전이다.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는 신을 알 길이 없다. 나는 부모님을 학습하지 않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신도 학습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 그만큼 인위적이란 얘기다.

 부모님이 느낌에 가깝다면 신은 생각에 가깝지 않을까? 느낌이 선천적이고 필연적이라면 생각은 후천적이고 우연성이 많은 것 아닌가? 종교는 선택의 영역이다. 어떤 신을 선택 하든, 않든, 각자의 자유다. 필연이고 절대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학습은 전적으로 문자에 의존한다. 모든 경전은 문자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문자 자체가 완벽한 도구가 아니라 매우 불완전한 도구이다. 불완전한 도구로 만든 경전이 완벽할 리 없다. , 절대적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강아지란 단어를 보면 우리는 똑같은 강아지를 떠올리는 게 아니다. 난 강아지 하면 항상 우리 집 개를 생각할 테고, 다른 사람 역시 강아지 하면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떠올리는 강아지와 다른 사람이 떠올리는 강아지가 다르다. 이처럼 모든 단어는 절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지시 대상을 가리킬 수 없다. 단어와 지시 대상과 일 대 일의 적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이를 언어학 용어로 미끄러진다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강아지라는 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실존하는 지시 대상이 아닌 개념(이미지)일 뿐이다.

 ‘강아지라는 단어는 실재 강아지를 반영한다는 플라톤의 잘못된 언어관이 언어를 절대화시켰다고 한다. 문자의 권위는 여기에 기반한다. 그러나 백여 년 전 소쉬르(스위스. 언어학자), ‘강아지라는 단어는 실재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개념)만 나타내는,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부호일 뿐이라는 진실을 찾아낸다. 이 천년 넘게 이어져 오던 문자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과학은 이론값과 실험값이 일치한다. 그래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자의적 해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반면 불경이든 코란이든 성경이든 저마다 해석하는 게 다르다. 왜냐면 언어라는 자체가, 관념(이미지)이라서 자의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리는 하나인데 각각 받아들이는 게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 교파가 갈리게 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유사 종교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를 문자로 담으려 했던 오류는, 언어학적 무지에서 온 것이리라.”(언어와 바둑 중에서)

 

 나는 그대론데 나의 상태에 따라 사람이든, 사물이든, 고정관념이든, 느낌이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체험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당위성으로만 말한다면, 지금이 맞는다면 그때도 맞아야 한다. 아니면 그때는 틀렸으면 지금도 틀려야 한다. 이것은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늘 변한다. “변덕이 팥죽 끓듯 한다고 하지 않던가. 구조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자기 동일성, 자기 투명성, 자기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라 정의한다. 인간 자체가 영원성이나 절대성 같은 것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이라는 말 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종교는 인류가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진화 되어왔다고 한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종교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종교의 위력은 현저하게 약화 될 것이다. 그것은 교의가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잃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천동설이 지동설에 부정되고, 창조론이 진화론에 부정되고, 결정론은 양자역학에 의해 부정되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다원주의다. 유일신(인격신)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음은 이 다원주의란 시대 정신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학습 때문 아닐까? 인간이 없다면 신의 의미는 없다. 인간이 있기에 신이 의미 있는 것 아닌가? 동식물만 있는 세상에 신은 무슨 의미일까. 의미롭게 해주는 인간이 있기에 신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바람이 차갑다.

 집에 돌아가서 토킨슨의 , 만들어진 위험을 마저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