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 위에 서다 / 김선녀 - 제1회 고동주 문학상 당선작
흰색 바지, 저고리가 잘 어울리는 그는 어름사니다.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하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잠깐, 입담을 터는가 싶더니 이내 줄을 더듬고 있다. 줄을 타는 모습이 물 찬 제비가 허공을 가르는가 했더니 그대로 떨어져 줄 위에 가랑이가 걸쳤다가 튕겨 오르는 듯 날아오른다.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어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손바닥이 붉어지도록 박수 보낸 분들은 오래오래 사시고 안 친 분들은 알아서 사시라는 재담에 또 한차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십여 년 전, 길을 가다가 마주한 공연은 한참 무르익다가 갈무리로 접어드는 모양이었다. 짧은 관람이었지만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무엇 하나 의지할 곳 없는 허공에서 외줄에 의지해 묘기를 보였다. 광대가 팽팽한 줄 위에서 낭창거리며 금방이라도 그의 몸이 줄 아래로 깃털처럼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생각이었고 광대는 마지막까지 멋지게 재주를 부렸다. 그때 본 광대의 줄타기 모습은 살면서 문득문득 떠올려지곤 했다.
하루, 하루를 사는 일은 줄 위에 선 광대가 되는 일이었다. 팽팽한 줄 위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사는 일이기도 했다. 갓 스물이 된 나는 안식처가 필요했다. 또래보다 일찍 시작했던 사회생활은 그야말로 한 번도 올라 본 적 없는 줄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휘청거릴 때마다 뻗어준 손을 잡고 꿈꾸기를 해야 할 그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줄 위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살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줄 위에 나를 세우려고 손을 잡아줬던 많은 사람이 말했다. 줄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너는 정말 멋진 광대가 될 수 있다고.
딱 한 사람은 달랐다. 어서 포기하고 내려와 자기와 함께 걷자고 손을 내밀었다. 구세주를 만난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을 잡는 동안은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아 줄타기를 포기하는 일은 아주 쉬웠다.
아이를 낳고 내 이름 대신 얻게 된 많은 이름은 나를 또 다른 줄 위에 올려놓았다. 외줄에 올라선 나는 버팀목 기둥을 잡고 줄을 더듬거렸다. 손을 잡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외줄 위 마주 선 기둥까지 갔다가 돌아서 다시 이편으로 오는 동안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갖은 재주를 부려야만 했다. 새로 얻게 된 많은 이름은 내게 새로운 재주를 익히도록 했고 재주가 늘어갈수록 고독은 견딜 만해졌다. 가끔 박수갈채라도 받는 날에는 광대가 누릴 수 있는 최대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팽팽한 줄 위에서 낭창거리기도 하고 가랑이를 걸쳤다가 날아오르기도 하면서 위태롭게 살아왔다.
몇 주 전, 공원 산책 중에 어름사니 줄타기 공연 안내 현수막을 보았다. 낭창대던 그의 몸놀림이 떠올랐다. 망 백의 어머니를 찾아뵙고 돌아오던 길 버스에서 내렸을 때 이미 공연이 시작되었는지 사물놀이 연주가 흥겹게 들렸다.
이제 막 줄타기 공연이 시작되려는지 줄 위 버팀목 한쪽 끝에 어름사니가 서 있다. 인생을 훑는 재담도 세월이 흘렀다. ‘줄타기 인생 사십 년이 되어갑니다. 벌써 오십 대가 되었는데 앞으로 이십 년은 더 부려먹어야겠지 않겠습니까.’ 무르익은 그의 입담은 여전했다. 관객들의 힘찬 박수 소리에 줄을 더듬고 있다. 어름사니의 몸놀림이 가뿐하다. 기둥 점에서 손을 떼고 홀로 선 모습이 늠름하다. 하늘 아래 거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무안히 평화롭다. 장마철 비가 잠깐 숨을 죽인 하늘빛 속에 하늘을 가르는 어름사니 몸매에 바지, 저고리가 아주 잘 어울린다. 그의 흰 옷깃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외줄을 더듬는 발놀림, 한 손에 든 부채로 길을 내며 사뿐사뿐 걸어가다 멈칫할 때마다 그가 한 마리 새처럼 보이곤 한다. 떨어져 내리는가 싶다가 다시 튀어 오르고 나붓이 줄 위에 앉는가 싶다가는 날아오른다. 줄과 허공과 어름사니가 하나 되어 자유자재로 자기를 부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을까.
지천명이 지난 지금, 또 다른 오르막길에서 이제는 새로운 줄타기를 해야 할 때인가. 돌아보면 그동안 수평으로 띄워진 줄 위에서 촘촘히 재주를 부렸다. 어린 나이 때는 절대로 광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새 세상에 띄워진 줄 위에서 다양한 재주를 부리며 한세상의 반을 보냈다.
이제 다시 사선으로 놓인 줄을 타고 버팀목 기둥으로 올라서야 한다. 어름사니처럼 멋지게 부려놓을 입담이 없는 게 아쉽지만, 기둥 위에 홀로 서도 이젠 세상이 보일 것이다. 몇 안 되는 관객과도 눈 맞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중심을 잃지 않고 잘 살아왔듯이 외줄 위에서 한 마리 새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심사평) 출처 : 통영신문(http://www.tynewspaper.co.kr)
심사위원단은 김선녀 작가의 ‘외줄 위에 서다’에 대해 “어름사니가 외줄 위에서 위태롭게 묘기를 연출해내는 것처럼 작가의 삶은 하루하루 사는 일이 줄 위 광대가 되는 일이었다. 삶 속 관객과 눈을 맞추며 외줄 위의 한 마리 새가 되는 상상을 하는 마음이 글 전편에 잘 그려지고 있다. 그 외 2편도 글의 매무새가 바르고 사유가 깊은 작품”이라며 심사평을 전했다.
이번 달 합평회에 추천 수필로 제1회 고동주 문학상 당선작 김선녀의 '외줄 위에 서다'가 올라왔다.
문학성을 논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의미 부여가 있느냐다. 둘째는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유가 있느냐다.
우리 모두는 잠시도 집중력과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흔히들 인생을 외줄타기에 비유한다. 이 관용구처럼 굳어진 익은말에 의지해, 작품을 풀어갔다는 데 대해 신인으로서 패기가 없어 보였다.
심사위원단은 작가의 사유가 깊다고 평하였으나 나의 관점으론 사유의 깊이가 낮다.
인생을 외줄타기로 환유하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실존의 불확실성이다. 누구의 인생도 죽기 전까지 실존에 대한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 아무리 돈 많고 행복한 회장님도 출장길에 비행기 사고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유로서의 외줄타기는 실존의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것이고, 행위로서의 외줄타기는 삶의 고통. 괴로움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본질이고 불변적이라면, 후자는 현상이고 가변적이다. 작가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하지 못한다. 사유가 일천하다는 이유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구분 없이 혼재되어 있으니 산문임에도 글이 명징하지 못하다.
물론 작가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주로 현상으로서의 가변적인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불변적인 것과 가변적인 것이, 뒤죽박죽이니 글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존의 불확실성은 인간의 운명이다. 외줄타기를 안 하고 혹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의 인생만 외줄타기가 아니고 생존하는 인간 모두의 삶이 외줄타기란 말이다.(불변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금수저로 태어나고, 흑수저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환경의 유불리가 실존의 불확실성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결혼해 남편이 생겼다고 실존의 확실성이 확보된다는 것은 아니다.(가변적인 현상일 뿐이다)
“딱 한 사람은 달랐다. 어서 포기하고 내려와 자기와 함께 걷자고 손을 내밀었다. 구세주를 만난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을 잡는 동안은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아 줄타기를 포기하는 일은 아주 쉬웠다.
아이를 낳고”
혼자 있다가 남편이 있고,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다고, 실존의 확실성이 공고해지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다만 의지 삼을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어, 덜 외로울 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실존의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어느 누구의 인생도 예외 없이 외줄타기다. 산다는 것 자체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줄타기다. 그런데 작가는 외줄타기를 해도 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본질과 현상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다. 실존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누구는 부유해서 좀 편하고 상대적으로 빈곤해서 고달픈 면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실존의 불확실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란 종(種)만이 상대를 무작정 공격하지 않고, 상대와 협력하려 든다고 한다. 그래서 인류가 문명을 건설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물가에 빠지기 직전이면, 보는 사람 누구든지 달려가 잡는다고 한다. 이를 공자는 인(仁),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악한 면도 분명히 있지만, 선한 면도 분명히 있다. 이 선함에 의지해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켜 왔을 것이다. 고로,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지 적대적이지 않다. 물론 가끔 가다가는 갈등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외줄타기와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자꾸 줄 위에 나를 세우려고 손을 잡아줬던 많은 사람이 말했다. 줄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너는 정말 멋진 광대가 될 수 있다고.”
여기서 외줄타기는 불행한 현실 자체다. 그러나 작가 주변의 대부분 사람은 작가가 불행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에서 보면 작가가 불행하게 유도한다는 느낌이다. 이웃에게, 공동체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글은 자기 객관화가 안 된 글이다. 내 인생만 외줄타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웃 모두가 외줄타기 인생이란 걸 놓치고 간다. 흔히들 인생은 지속적 고통, 간헐적 행복이라 하지 않던가. 다른 말로 하면 나만 유별나게 불행한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란 말이다.
“어름사니처럼 멋지게 부려놓을 입담이 없는 게 아쉽지만, 기둥 위에 홀로 서도 이젠 세상이 보일 것이다. 몇 안 되는 관객과도 눈 맞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고 주체자임으로 누군 공연자고, 누군 관람자로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삶에 있어서 만큼은 공연자와 관람자로 나눈다. 설득력 없는 설정이다. 우리는 모두 피에로고, 어름사니일 뿐이다. 관객이 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문학성을 논하기엔 사유의 밀도가 함량 미달이다. 이상은 나의 거친 총평이다.
다음은 세부적 문제점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장편 소설에서조차 한 번 사용한 단어는 두 번 다시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작가의 어휘력 문제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란다. 비슷한 말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같은 단어를 반복하느냐는 것이다.
원고지 12매 짧은 산문에 낭창거리며. 낭창거리기도, 낭창대던. 무려 낭창이란 단어가 3번 반복된다. 또, 재담에, 재담도, 입담은, 입담이 반복된다. 이것은 작품에 대한 조탁이 전혀 안 됐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어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언어’보다는 ‘언변’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언어는 학술용어고 언변은 일상용어에 가깝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