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의 어느 멋진 가을날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서정주 시에 송창식이 곡을 붙여 부른 “푸르른 날에”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전형적인 가을날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와 토스트로 창가에 앉자 아침을 먹는 일요일,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중에서) 오십 후반 나이에도 느낄 수 있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밴(van)을 빌려 가 홈디퍼(Home Depot)에서 큼지막한 소국 화분 두 개를 사 왔다. 반쯤은 노랗게 피고 반쯤은 꽃봉오리가 맺혀 있는 꽃들이 얼마나 소담하고 예쁜지 하루 종일 설레었다. 횡재를 한 느낌이랄까, 수지맞은 기분이랄까, 도무지 마음이 들떠 진정이 되질 않았다. 내 인생에서 국화꽃과 함께 한 시간은 행복했기 때문일 거다.
대개 고향과 유년 시절은 인간에겐 유토피아다. 세계와 내가 유일하게 갈등하지 않았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고향을 떠나 세상과 갈등하면서 인간은 운명적으로 유토피아를 상실하게 된다.
그 꿈같던 시절, 시골집 바깥마당 끝자락엔 소국 더미들이 있었고 가을이 깊어져 갈수록 향기 또한 깊어만 갔다. 철부지 악동조차 그 향기에 취해 어쩔 줄 몰라라 했다. 미당은 국화더러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 했지만, 나에겐 국화는 고향 꽃이다. 고향 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국화와 뒤꼍의 대숲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약골로 병치레를 많이 해 초·중·고 학창 시절 결석을 많이 했다. 중. 고생이 된 후론 학교를 못 가는 날은 오후에 천천히 뒷산 산책을 하고 나면 저녁때가 되곤 했다. 동구 밖 과수원 길을 지나면 오솔길이 나왔다. 솔 향기, 산새 소리, 들국화 향기, 거칠지 않은 바람결 … 아늑하고 아득했다.
오솔길에 접어들면 우선 산 흙냄새가 진동했다. 그걸 욕심껏 호흡하고 천천히 걷는다. 산 흙냄새는 묵향 같기도 했다.
특히 가을날 오솔길은 너무너무 좋았다. 양길 가엔 샛노란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어서 그 향기만으로도 난 충분히 아프지 않았고, 그리곤 며칠간은 학교를 잘 나간다. 이 향기들은 아픈 내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향기가 내 몸에서 다 빠져나가면 난 다시 아팠고……
얼마나 견문이 좁고 무지한 촌사람인지 난 국화꽃이 커다란 것도 있다는 걸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처음 알았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읍내로 나갈 수 있었던 나는 시내에 사는 같은 반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작지 않은 이층 양옥이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온통 만개한 대국 화분이 계단, 베란다는 물론 뜨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 번도 상상하거나 꿈꿔보지 못한 풍경에 감탄조차 할 수 없었다. 아름답다는 감격보다 그저 당혹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국화는 아무 데서나 막 자라는 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즉 가꾸는 꽃이란 걸, 귀하디귀한 꽃이란 걸 그제야 알았다. 그 많은 화분 하나하나가 흠잡을 게 없을 정도로 대국은 탐스러웠고 우아했다. 무슨 품평회 나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소일거리로 가꾸셨다지만 심혈을 기울인 게 역력했다.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다. 당시 친구네는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기품 있는 부잣집 같았다.
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꽃은 국화다. 내 유년의 꽃, 고향의 꽃, 지금은 오솔길 초입에 부모님 묘가 있고 산소 양옆으로 형님이 심어 놓은 소국이 무성하다.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사는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보는 오늘이 바로, 결혼 축가로 많이 불린다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란 걸 난 안다. 사실 특정된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이란 없다. 전적으로 주관적이란 것이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깨닫는 순간, 그때가 아닐까?
마침내, 시월이 왔네요!
그윽한 국화 향기, 시리도록 푸른 하늘,
가을은 역시 한국인데...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깨닫는 순간이 바로 가장 멋진 날이겠죠?
가을의 문턱을 아름답게 장식해줘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