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왕이 된 남자

 

 

 쉬는 날홈디퍼(Home Depot)에서 톱을 사다 뜨락의 야자나무를 정리하고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를 다시 보았다.

 박근혜 정권이 좌파 영화라 낙인찍어 이것을 만든 CJ 그룹 부회장 이미경을 미국으로 내쫓았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LA 한인타운 마당 몰 CGV 영화관에서도 개봉되었던 영화다.

 

 광해군의 아버지는 조선 최악의 왕으로 손꼽히는 선조다세자 광해는 임진왜란 때 선조 왕을 대신해 전란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우고왕이 되어선 초반엔 정치도 제법 잘 한 사람이다.

 이 영화는 광해군과 허균의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놓은 사극이다왕인 광해군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승지 허균에게 대역을 찾으라 명한다이에 허균은 광해와 외모가 닮은 천민 하선을 찾아내 가짜 왕 노릇을 시킨다과거 일본에서처럼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가짜 군주(카게무샤かげむしゃ)군주와 닮은 사람을 선정하여 진짜 군주 대신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위장 대역인 셈이다.

 난폭했던 광해와 달리 하선은 인간미 넘치는 임금으로 선정을 베풀며 국사를 너무나 잘 돌보게 된다그러나 역모를 꾸미던 신하들은 궁녀를 통해 광해군이 진짜 광해군이 아님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간다이 사실을 알고 하선은 도망치나 군사들에게 막히고 이에 가짜 왕임에도 그를 흠모했던 호위부장이 결사 항전하여 하선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하선에게 허균이 찾아와 고개 숙여 인사하는(가짜 왕 노릇 하느라 수고하셨다는 감사의 뜻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한편일본의 3대 영웅 중 한 사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실 카게무샤(影武者영무자)가 연기했다는 설도 있다만약 영화 속의 하선처럼 최순실이 박근혜의 대통령 노릇을 잘했더라면 무능한 박근혜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최순실은 카게무샤의 변종 같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하여 양민들의 세금을 줄여주고자 하나 서인들이 별 해괴한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장면을 보면서이명박 정부에서 종부세를 폐지하여 부자들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과 똑같아 보이는 건 왜일까이 당시 양반은 실제 2%였으니 2% 부자 세금 깎아서 98% 국민 희생시키는 오늘 날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영화 속에서 너희에겐 가짜 왕일지 몰라도 나에겐 진짜 왕이다란 호위부장의 외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가짜 왕과 진짜 왕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전언인데형식은 내용을 담보하고 내용은 형식을 담보한다는 고전주의 문학 이론을 되새기게 한다형식이 바뀌면 내용이 바뀌고 내용이 바뀌면 형식이 바뀐다형식과 내용이 별개일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다.

 내용이 진짜(진실)일 때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호위부장의 파격은 반역이다형식이 가짜일지라도 내용이 진짜면 진리라는 호위부장의 외침은 작은 혁명이다.

제도(형식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게 인간 삶(내용)이다그러나 제도()의 구속력이 인간의 삶(내용)보다 중요시되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인데제도를 운용하는 권력자들이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광해왕이 된 남자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호위부장은 기꺼운 미소를 머금은 채버선이 다 더럽혀진 가짜 왕 하선의 발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안고 죽어간다그는 눈빛으로 말한다. ‘당신을 위해 죽는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왕은 그를 부여안고 오열한다한 사내가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어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할까여한이 없지 않은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중략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유치환 행복” 중에서목숨을 미소 지으며 바쳤으니 우정이라 할 순 없고 오직 사랑일 뿐.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군왕에게 신하는 흔쾌히 목을 내놓는다목숨을 내걸었기에 단순하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그보다 더한 순정이 어디 있으랴마음과 마음의 교감소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아니 호위부장은 가짜 왕이란 걸 알면서도 인간 대 인간으로 그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사랑하였으므로)

 

 영화를 보고 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시대 인물인 이순신이란 남자와 윤동주란 남자가 만났다면 그들은 어떤 사랑을 나누었을까 생각하다.

 임진왜란 그 참혹한 전장을 누비면서도 오직 침묵으로만 일관했던 사나이 순신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사내 동주가 만났다면 그들은 어떤 사랑을 나누었을까투박할지라도 멋이 없을지라도 사내들의 ‘Love Story’가 보고 싶다.

 남녀 간의 사랑은 총천연색 사진같이 화려하다면 사내들의 사랑은 수묵화 같으리라단조로우나 담백하고 암묵으로 일관하니 여백이 많으리라그러나 그 울림은 넓고 깊으리라.

 

 몸과 마음을 다한 사랑은 아름답지만너무 아프다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아프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는 영악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