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默珠) 팔찌

 

 

 오십 중반을 넘어 팔찌가 하고 싶어졌다. 평생 반지나 시계도 거추장스러워하지 않았는데, 얼마 전부터 팔찌란 게 하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보석이 장식된 화려한 액세서리를 하기에는 멋쩍어 보이고 민망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지인에게 지나가는 말로 묵주 팔찌를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물론 그분은 내가 종교가 없다는 것도, 종교를 갖지 않을 사람이란 것도 잘 안다. 그냥 한 말이라 이 일은 한참을 잊고 지냈는데 몇 달 후, 그분이 바티칸에서 사 온 거라며 묵주를 선물로 주셨다. 어찌나 황송하던지, 그 묵주 팔찌를 여름 내내 하고 다녔다.

 

 얼마 전 한국에서 막 유학 온 대학원생(박사과정)이 나에게 성당에 나가냐고 반갑게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까 실망하며 그런데 왜 묵주 팔찌는 하셨냐고 반문했다. 그냥 액세서리로 하고 다닌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니, 액세서리라면 염주 팔찌도 있는데 굳이 묵주 팔찌를 하셨냐고 재차 물었다. 집요해지는 그의 질문에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 대답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선생이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쇼를 할 때, 염주를 액세서리로 사용해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염주 팔찌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묵주 팔찌를 액세서리로 택한 것은 천주교에 대한 오래된 호감 때문이다.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을 어렸을 때 배웠다. 18세기 전후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려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정약용을 존경하기에, 맨 처음 천주교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 군사 독재 정권에 방패막이기가 되어 주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지학순 주교님이 좋았다.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하는데 이분도 천주교 신자였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좋아했는데 이분 역시 천주교 신자다. 하여튼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여서 가톨릭에 대한 정서적 호감은 뿌리가 깊다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불평등은 사회악의 근원이라 말씀하시며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친근한 벗으로 다가오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 자꾸만 정약용이 떠올라 기분이 흐뭇해지곤 했다.

 그래서 염주가 아닌 묵주를 액세서리로 택했다. 유학생처럼 왜 믿지도 않으면서 종교적 상징물인 묵주 팔찌를 하고 다니냐고 따진다면 논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절대적 진리만 있을 뿐 상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그와 어떤 논전을 해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는 믿는 자만의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종교가 없더라도 종교의 영향에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집 만해도 큰 누님. 작은 누님은 반야심경을 입에 달고 사는 불자시고, 아들 녀석은 미션스쿨(.중학교)을 졸업했다. 무엇보다도 아내는 성경을 일곱 번 정독할 정도로 믿음 깊은 개신교 신자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었기에 나와는 갈등이 없다. 이처럼 종교는 삶의 일부이고 문화이기 때문에, 그것은 믿는 거와 별개로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교회를 안 다녀도 크리스마스 때는 많은 사람이 성탄절 카드를 보낸다. 믿음과 상관없는 문화적 행위일 뿐이다. 불자여야만 불경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며, 교인이어야만 성경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란 단언에 동의할지라도, 삶에서 종교나 신은 부정할 수 없는 실체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데 이를 무슨 수로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종교 또한 한 사회의 문화라는 사실이다. 종교인만 독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문화를 누리는데 무슨 요건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는가.

 

 묵주 팔찌가 좋다. 금속성이 아닌 나무라서 더욱 좋다.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황금 팔찌를 했다면 가볍게 행동을 해도 되겠지만 감히, 묵주 팔찌를 끼고선 함부로 행동할 수 없지 않은가. 신을 믿지 않지만, 종교적 상징물이 주는 구속 자체가 나를 경계하게 하기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