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혁아.
너는 이제 10학년이지만 지금처럼 운동과 공부를 열심히 하여 듬직하고 바른 청년으로 성장해다오. 종종 말썽도 일으켰지만, 아빠는 항상 너를 믿으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네가 잘 알 것이다. 그동안은 네가 너무 어려 편지를 쓰지 않았지만, 이젠 너도 조금은 성숙해져 아빠가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돼서 기쁘다.
미국 하와이에 올 때는 초등 4학년 얘기였지만 지금은 키와 덩치가 아빠만 하게 자라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영어가 우리말과 우리글보다 편한 네가, 아직도 박지원의 "열하일기", 정조대왕, 화성, 정약용, 거중기 등을 기억해줘서 고맙다.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국악 버전으로 해놓은 너의 핸드폰 컬러링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 뭉클하도록 고맙디고맙다. 부디 언제나 한민족의 참된 정체성을 잃지 말거라.
아빠는 더 이상 욕심이 없다. 지금처럼만 운동과 공부를 열심히 해주길 바란다.
혁아! 네가 채플 시간에 배웠듯 인간은 완전자(完全者)가 아니라 불완전 자다. 그래서 누구든 실수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아빠도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실수하고 잘못도 한다. 그러나 실수든 잘못이든 반복하면 그것은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 고의(故意)이며, 이는 죄를 짓는 것이 된다. 한두 번의 실수나 잘못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지만, 되풀이되는 실수나 잘못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으며 모든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그러니 항상 사색(思索)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 말거라. 인격이란 깨달음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이란다.
운동과 음악을 좋아하는 우리. 너와 내가 취미가 비슷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취미가 같다는 건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며, 이는 혈연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나누는 친밀감이 남다를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아빠와 아들이라는 생물학적 가족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靈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영적 관계란 아빠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떠나 독립된 인격 대 인격으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며 감정을 충분히 교감해 영혼이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엄마 아빠가 대화가 없거나, 혹은 부모와 자식들 간에 대화가 없거나, 이 세상에는 대화 없는 가족이 의외로 많단다. 그것은 영적 가족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취미, 취향, 사고방식이 비슷하다는 건 영적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 면에서 너와 나는 공통점이 많으니 분명 축복을 받았다. 그래도 아빠는 더욱 너와 견고한 영적 가족관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한다.
너와 내가 취미가 같은 게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빠는 너와 나눌 대화가 많아 좋다. 즉 너와 폭넓은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감성적 교감이 가능해 영적 가족관계까지 견고해지기에 너무 좋은 것이다.
우리가 같이 운동도 하지만 너는 내게 피아노를 잘 쳐주고 질문을 잘하지. 인터넷 유튜브(Youtube)를 보며 어떤 버전(version)이 더 듣기 좋은지 묻기도 하고 곡의 느낌을 말하곤 하지. 이런 것들이 아빠는 너무 행복하단다.
음악에 관해 나누었던 너와 나의 대화를 여기에 다시 써보마.
너는 바다르체프스카(T.Badarzewska)의 작품, "소녀의 기도"(The Maiden's Prayer)를 치고 나서 아빠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지.
"아빠! 기도하는 곡이 왜 이렇게 밝죠? 뭔가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아요."
음악적으로는 아는 게 없으니 문학적으로만 말한다며 아빠는 이런 대답을 했지.
"혁아! 만약에 제목이 <병사의 기도>였다면 어떻겠니?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소녀라면 중. 고등학교 다니는 여학생인데, 이들이 인생에 대한 어떤 아픔이나 상처가 있겠니? 기도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제가 좋아하는 앞집 브랜든이 저에게도 관심을 갖게 해주세요.' 라든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부모님이 제게 아이폰을 선물하게 해주세요.' 정도일 것이다. 심각할 리 없겠지. 그러나 병사의 기도라면 바로 옆에서 전우가 죽어가고, 도시는 다 파괴돼 유령들의 소리만 들리고, 살아 부모님께 돌아가고 싶고...... 전쟁의 처절함, 공포, 그리고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 등으로 해서, 곡의 분위기는 소녀의 기도처럼 아름답고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전쟁의 참혹함 때문에 무겁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 때문에 간곡할 것이다.
병사의 기도와 달리 소녀의 기도가 밝고 아름다운 것은 그가 아직 세상을 모르고 꿈을 꾸는 어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또, 넌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너의 마음속엔 강이 흐른다)을 치고 나서 내게 이런 질문을 했지.
"아빠! '네 안에 강이 흐른다.'는 데, 왜 이 곡의 분위기는 슬프죠?"
아빠의 대답이 장황하고 교육적이라 따분할 수도 있었건만 너는 진지하게 들었다.
"혁아! 강은 생명의 젖줄이라서 인간의 삶과 떼어내래야 뗄 수가 없단다. 즉 물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물이 있는 곳에서 시작됐다.
인류 4대 문명이라 하는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강가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강가에서,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강가에서, 황하 문명은 황하강 강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강은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흐른다. 인간의 삶은 즐겁기도 하지만 대체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수많은 전쟁과 질병 등을 겪어온 인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흐르는 강은 그래서 슬플 수밖에 없다.
<River flows in you>, 이 피아노곡은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기쁘건 슬프건 사랑도 인간의 삶이다. 이 사랑을 강에 빗대어 표현했으니, 이 곡이 아름답지만 결국 슬플 수밖에 없다.
혁아! 강이 그저 흐르고 있는 물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너에게 얘기했다.
앞에서 언급한 소녀, 병사, 기도, 등등 우리가 쓰는 일반명사는 정보전달에 필요한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내포된 상징성이란 게 있다. 그 단어들이 가진 드러나지 않은 뜻이며, 이것을 문학 용어로 원형상징(原型象徵)이라 하고, 겉으로 보이는 게 아니니 공부해야만 아는 것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빠가 문학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공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거란다. 너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네 몸속에 피와 뼈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네가 과학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저 바다를 보아라. 너는 아까 파랗다고만 했다. 그러나 파란 것은 현상이고 본질은 아니다. 바닷물이 파란 것은 빛의 파장과 굴절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 본질은 염분이 함유된 파란색이 아닌 물일 뿐이다. 저 바닷속에는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와 해초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공부다.
공기가 보이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이지는 않지만,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이 보이냐? 보이지는 않지만 깨어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느낀다. 보이지 않는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역시 공부해야만 한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감성을 키우고 지식을 쌓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공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해 준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은 현상을 본질로 오해하지 않기 때문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산다는 것은 끝없는 판단과 결정이다. 공부와 사색을 많이 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항상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공부는 현실적으로 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도구라서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궁극적으로 네가 인격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공부밖에 없으므로 중요한 거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공부를 기꺼이 사랑해라.
물론 나도 늘 독서와 사색을 통해 좋은 아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혁아! 어린 네가 커서 이제 아빠가 이런 말을 해도 이해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더더욱 운동과 음악을 함께 공유하며 나눌 수 있는 여러 가지 대화들이 참 좋다.
"River flows in you", 너는 아빠에게 이 곡은 한국 출신으로 올해 31살의 뉴에이지 뮤지션 이루마의 곡이라 설명했지.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트와일라잇 시리즈(Twilight Series)'의 영화개봉을 앞두고 작년 말 유튜브(Youtube)를 통해 알려져 화제가 되었으며, 이 영화의 배경음악이라서 미국 청소년들 특히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피아노곡이라 했지.
그래서 네가 이 곡을 쳐주면 반 여학생들이 손을 잡고 조용히 춤을 춘다지.
무엇이든 남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랑스러운 내 아들 혁, 사랑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여라.
"공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해 준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은 현상을 본질로 오해하지 않기 때문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 공부의 중요성을 잘 정립하셨네요! 그래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어요.
부성애 가득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