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2)
텍사스 어스틴의 겨울밤은 한국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추위가 매섭다.
주말 밤이지만 아들 녀석은 낮에 농구 시합을 하고 와서 저녁을 먹자마자 피곤하다며 자러 들어갔다. 아내도 감기 기운이 있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두어 시간 책을 읽다 눈이 피곤해 덮어두고 조용히 음악을 듣는다.
멀리 아스라이 들려오는 기적소리를 차가운 바람 소리가 덮는다. 문득 고향 집 뒤꼍 대나무 숲에 일던 바람 소리가 생각났다. 밖은 싸늘한 바람 소리가 지나치지만, 방안은 한 잔의 와인과 애틋한 노래가 흐른다.
요즘 자주 듣는 노래는 박기영이 호란과 듀엣으로 부르는 “동행”이다. 슬픈 선율과 아름다운 화음이 좋기도 하지만 가사가 상념에 잠기게 하기 때문이다.
“너를 갖지 못해 집착했나 봐/ 지극히 위험한 너의 향기가/ 온통 나의 마음속에 가득해/ 아름다운 세상 속/ 너와 나 둘이서 머무르자고”('동행' 중략)
이 “동행”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아픔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중엔 온갖 말 못 할 사연들도 많을 것이다.
왜 ‘지극히 위험한 너의 향기’란 걸 알면서 갖고자 집착하는가. 그리고 갖지 못해 아파하는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
화단에 곱게 핀 꽃보다 절벽에 피어있는 꽃이 더 예쁘고 애잔한 것은 가질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화단에 핀 꽃이라면 갖기 편할 텐데 굳이 절벽 위에 피어있는 꽃을 갖고 싶어 할까. 가질 수 없는 것,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아니면 금지나 금기에 대한 도발이나 위반 같은 파괴본능 때문일까.
우리 삶이 유지되기 위해선 제도나 도덕을 지켜야만 가능하다. 이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제도나 도덕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야만 한다. 이는 각자 무의식 속으로 질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내면화돼 숨는다.
고로 제도나 도덕이 아무리 합리성과 정당성을 담보했을지라도 이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저항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 내면에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野性)이 사라지지 않는 탓이다.
이성의 산물인 도덕과 감성의 산물인 사랑이 충돌했을 때, 도덕은 사랑을 일방적으로 제압하지 못한다. 몽테뉴는 “사랑은 규칙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규칙을 알지 못하는 사랑은 그래서, 때론 죽을 만큼 아픈 것이리라.
좌우간, 현재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행복하리라.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일상의 감정이 아니고 축제의 감정이다. 인생은 축제가 아니라 일상으로 거의 다 채워진다. 사랑에서 일상성을 회복하는 일은 난제 중 난제다. 축제는 즐겁고 기쁘게 ‘즐기는 시간’이지만, 일상은 괴롭고 슬픈 것들을 ‘견디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동행’은 축제에서 꿈꾸는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 꿈꾸는 일이다. 동행은 사랑에서 일상성의 회복을 뜻하는 단어다. 즉, ‘동행’은 연애를 넘어 평생 함께하고자 하는 결혼생활을 의미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연애가 제아무리 아름답거나 애절하거나 해도 그것은 모두 함께하고자 하는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연애가 대단히 거창하고 중요한 것 같지만 동행에 비교하면 별것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애와 동행은 다른 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내 그대에게 해 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황동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중에서 )
이처럼 깊은 사랑은 특별함을 평범하므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동행에는 우리가 염원하는 ‘영원성’이 깃들어 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이상은 축제가 아니라 일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힘들고 괴롭고 아플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길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구름처럼 수시로 일었다 지는 막연한 것이고 삶은 누구나 살아내야 하는 실체다. 삶에 기반하지 않는 사랑은 바람과 같다. 사랑의 완성은 두 남녀가 삶의 고단함을 함께 위로하며 견뎌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거룩한 것이다.
위에 소개한 시는 삶(일상) 속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 주려는 마음이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랑이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감정이 지속되려면 상대에 대한 배려 즉, 받기보다는 주려는 마음이 우선해야 한다. 그리고 생활 자체가 담백하고 성실해야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다. 믿음과 신뢰가 안 생기면 아무리 뜨거웠든 사랑도 식게 마련이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서로의 땀을 닦아주며 가는 오늘 하루하루가 ‘동행’이다. 영원한 사랑의 이상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쌓여 아주 특별함이 되는 ‘영원한 사랑’은 삶에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내려지는 축복이다.
산 설고 물선 객지에서 그대, 나와 동행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김원 선생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동행하는 부부'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연애가 '애욕'이라면 결혼은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하니 단계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