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위로 / 노상비
석남사(石南寺) 근처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산속에 조용한 이층집이었다. 얕은 냇가를 지나 비스듬한 언덕길을 조금 지나니 집이 보였다. 길옆에는 몇 채의 전원주택이 있었고 맞은편 숲에는 푸르른 나무들이 가득했다. 그 나무들 밑에는 보랏빛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맥문동이었다. 보라색 꽃물결이 아스라하게 내 마음의 그리움을 건들고 지나갔다. 눈에 닿는 것이 모두 애절함이었다.
그녀의 아들에게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천안 병원으로 내려갔다. 코로나 상황이어서 친지가 아닌 사람은 중환자실에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병명이 말기 암이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보름 남짓한 시간 사이에 그녀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순식간에 닥친 이별이었다.
그녀와 나는 대만에서 함께 유학하던 친구였다. 아니 그녀가 2년 선배였다. 우리는 유학 생활의 마지막 2년을 기숙사에서 나와, 아파트에서 함께 논문 작업을 했다. 우리는 가끔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 전우(戰友야)"라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서로를 지켜보며 언덕을 넘었기 때문이다. 전우란 전장에서 총을 맞으면 부축해서 병원까지 옮겨주고, 회복할 때까지 수통의 물을 먹여주는 존재 아닌가. 우리가 그랬다. 그러나 마지막에 전우는 무심하게 전우를 보냈다. 물 한 모금 먹여주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나는 휘청거렸다.
그녀가 퇴직을 하고 안성의 산속에 집을 마련하고 초대했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원고가 밀렸다는 핑계로 그렇게 만나지 못했다. 참 후회가 된다. 몇 번 통화만 했을 뿐이었다.
"요즘 뭐해요?"
"신화 책 정리하고 있어"
그녀는 중국 신화가 전공이었다.
그녀의 49재는 깊은 산속에서 있었다. 수목장이 끝나고 석남사 근처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엎치락뒤치락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문득 생각났다. 그녀에게 중국 신화의 유고(遺稿)가 있으리라. 그녀의 유고집을 만들고 싶었다. 그것만이 허무하게 가버린 그녀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었다.
그녀의 서재는 2층에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익은 가구며 책들 그리고 소파까지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유품을 정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던 아들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그녀의 책상을 찾고 있었다. 그녀가 쓰고 있다던 중국 신화의 유고가 어디에 있을까? 책상은 창가 쪽에 있었다. 급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가장 많이 앉아 있었을 그녀의 책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가지각색의 색연필이 가득했다. 스케치북과 컬러링 북이 옆에 놓여 있었다. 중국 신화에 대한 책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익은 신화 서적은 서가에 꽂혀 있었다. 다양하고 화려한 색연필들 옆에 컬러링 북에는 그녀가 채워 넣은 꽃과 나뭇잎 또는 물방울, 구름의 모습이 아름다운 색들로 꽉 차 있었다. 분홍색, 연두색, 주홍색, 녹색 등 밝은색들이었다. 그것들이 주는 긍정적인 위로의 에너지가 그곳에 있었다.
스케치북을 넘기다가 밑바탕을 엷은 보라색으로 칠한 꽃 그림이 보였다. 그녀는 보라색을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보라색 그림이 많았다. 그녀는 가끔 무채색 상의에 보라색 티셔츠와 블라우스를 입었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생각을 하니 보라색이 반가웠다. 그녀의 그림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느껴졌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이 합쳐진 색이다. 보라색이 간혹 신비로운 색이라는데 아마도 두 색이 합쳐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따뜻한 계열의 색이기도 했다.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서운함은 사라져 갔다. 내가 보라색에 따뜻함을 느꼈는데, 그녀 역시 보라색으로 그림을 그리며 위로를 느꼈으리라.
색의 힘을 느낀다. 인간에게 감정적, 정신적, 신체적으로 영향을 주는 강력한 언어이다. 우리가 빛을 통하여 색을 볼 때, 우리 몸으로 들어온 색의 파장은 신경을 자극하고 호르몬을 생성하여 신체에 큰 영향을 준다. 눈을 통하여 들어온 빛은 뇌신경 세포에서 세로토닌을 분비하여 마음의 안정과 기쁨까지도 일으킨다.
한적한 산속으로 거처를 옮길 때부터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때부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자기의 병과 마주하며 외로움을 이기기 위하여 밝은색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죽음을 향해 갔을 것이다.
수목장 장면이 생각났다. 아들이 그녀의 유골함을 들고 석남사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도 그의 뒤를 쫓아갔다. 주위는 푸르른 녹음으로 울창한데 그녀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나도 그녀의 유해를 한 줌 쥐어 허공에 뿌렸다. 바람에 날려 사뿐히 산속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왔던 길로 돌아간 것이다. 흙으로 돌아갔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