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딤의 길목 / 박갑순

 

 

겨울의 문턱을 넘는다는 건 단순히 기온이 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무언의 시간이 가지런히 쌓인다.

전북 부안 주산면의 겨울은 늘 길고 깊었다. 서해의 바람은 습기를 머금은 채 매섭게 휘몰아쳤고, 줄포만 갯벌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은 들판을 따라 흐르다 마을 골목골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볕이 드는 낮마저 금세 저물어 버리는 계절, 텅 빈 들녘과 스산한 바람 사이 우리 집 안방 윗목에는 해마다 고구마 퉁가리 두 개가 자리를 잡았다.

대쪽으로 엮은 퉁가리 안에, 찬 서리를 견딘 고구마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인 고구마들은 마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성벽 같았고, 그 너머에서 스며 나오는 달큰한 냄새는 무심한 세월 속에서 삶을 지탱하는 온기였다.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은 경이로웠다.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은 고구마들이 서로 기대어, 방 안에 조용한 기적처럼 온기를 품고 있었다. 불을 때지 않아도, 퉁가리 주변은 언제나 포근했다.

그 시절, 고구마는 간식도 건강식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루를 버티는 주식이었고, 고단한 노동과 인내로 빚어진 생명의 빛이었다. 고구마 한두 개가 점심이고 간식이며 저녁이었다. 가마솥에 사기 주발을 엎고 물을 부어 찌는 고구마에서 피어나는 달큰한 향기는 집 안 구석구석에 삶의 연대기를 새겼다. 우리는 배불리 먹는 것만으로도 삶의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퉁가리를 채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조왕리 밭에서 고구마를 캐는 날, 종일 삽과 괭이, 호미를 들고 땅을 파야 했다. 차가운 흙 속에서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고구마를 캐낼 때면, 그 땅의 깊은 시간과 생명을 손으로 만지는 듯했다. 노동은 어린 몸에 버거웠지만, 낯설지 않은 일상이었다.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 밭둑에 놓인 연장들, 감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 그 모든 것이 주산면만의 시간을 이루었다.

우리 집에는 리어카가 없었다. 그 시절 동네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었기에, 앞집에서 빌려야 했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그 집 대문을 두드렸고, 리어카를 빌릴 수 있는 날이면 큰 선물을 받은 듯 기뻐하셨다. 대개는 다라이에 고구마를 담아 머리에 이고 집까지 날랐다. 몸은 자꾸 휘청였고, 다라이를 꽉 쥔 손은 저렸지만, 삶의 무게를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자, 견딤의 시간이었다.

그 길은 지금도 눈 감으면 떠오른다. 조왕리 밭둑을 지나 감나무 가지가 바람에 춤추던 동산마을 언덕을 돌아, 우리 집 마당에 이르는 흙길, 뽀얗게 말라 부서지는 자갈과 발바닥을 스치는 풀잎 내음이 섞여 있던 그 길, 나는 그 길 위에서 조금씩 나로 자라났다.

고향 부안의 겨울은 어머니의 숨결과도 닮아 있다. 새벽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아랫목 온기를 손등으로 확인하던 어머니의 손은 늘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말없이 견디는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부안의 여인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트고 굽은 손등과 허리는 땅과 가족을 품는 강인한 흔적이었다.

겨울은 견디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견딤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가장 깊고 질긴 뿌리가 되어 포근하게 생을 붙든다. 어머니는 삶의 언어로 그 진실을 보여주셨다.

퉁가리가 차오를 때면 마음도 든든해졌지만, 겨울이 깊어갈수록 고구마는 하나둘 줄어들고 퉁가리는 점점 빈속을 드러냈다. 남은 고구마는 없고, 봄은 아직 멀었다. 빈 퉁가리는 허전했지만 오히려 더 귀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허기와 기다림을 품은 그릇이자, 한 계절의 사랑을 다 쓴 자리였다.

지금 나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겨울을 맞는다. 따뜻한 바닥과 넘치는 음식, 손끝 시리지 않은 공간 속에서도 고향의 겨울이 어쩐지 그립다. 주산면 들녘에 바람이 불고, 줄포만 바다 건너 붉게 물든 해가 감나무 가지 사이로 기우는 풍경, 그 속에 묵묵히 서 있던 고구마 퉁가리 두 개, 그 모든 것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마음에 그려진다.

고구마 퉁가리는 단순한 저장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겨울이라는 시간을 견디는 존재의 기록이며, ‘견딤’이라는 생의 언어가 조용히 스며든 고요한 증거다. 추위와 노동, 사랑과 인내, 나눔과 자라남의 모든 이야기가 그 안에 잠들어 있다.

오늘도 나는 스스로 묻는다. 내 안의 퉁가리는 얼마나 단단한가. 지금 내 삶을 채우는 것은 무엇인가. 견디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품고 서 있는가.

고향 부안의 겨울은 여전히 내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줄포만의 바람처럼, 조왕리 흙길처럼, 나는 지금도 그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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