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감자떡 / 홍경식 

 

하지夏至를 지나 감자를 마무리할 즈음이면, 우물가 둔덕엔 배가 불뚝한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놓인다. 대개는 금이 가서 철사로 동여맨 퇴역 무렵의 항아리들이다. 흠집이 있거나 썩어드는 감자를 골라 거기 담고는 무시로 물을 갈아 우려내면 악취를 풍기며 발효하던 감자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한을 삭이듯 착 가라앉아 정한 앙금이 된다.

그걸 떠다가 햇콩이며 동부를 다문다문 놓아 빚은 거무스레한 감자떡, 쫀득하고 담백한 무미의 맛이며 콩이며 동부의 감칠맛이 여태도 혀끝에 남아있다. 나는 감자떡을 생각하면 문득 수필이 떠오르고, 수필은 감자떡 같은 것이라는 상념에 잠기곤 한다.

젊은 시절의 객기며 사된 뒤안길을 돌아, 이제 거울 앞에 선 누나처럼 인생을 지긋이 관조하는 넉넉한 여유와 삶의 앙금을 떠다가 담박한 맛이며 유장한 멋이 수묵水墨처럼 배어나게 빚어내는 것이 수필이라면, 연륜은 지명 고개를 넘었으되, 속 뜰엔 노상 비와 바람이요 뇌성벽력이니, 내가 수필을 써보겠다는 것이 애시당초 가당찮은 허욕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문학이 인생의 반영이라면, 수필처럼 무섭고 두려운 양식이 다시 있겠는가 싶다.

소설이 허구의 인생 속에 자신을 숨길 수도 있고, 시가 운율의 흐름에 바람결처럼 스칠 수도 있지만, 수필은 삶의 체험이 인격으로 승화된 진솔한 자기고백이란 생각에 이르고 보면 어찌 두렵지 않으랴!

길어야 20여 장 안팎의 원고지에 벌거벗은 자신을 내놓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긴장감을 함께 느끼게 한다.

허나 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비 갠 뒤의 청량감이며 숭늉같이 구수한 맛, 혹은 빛나는 기지며 탈춤 같은 해학에 삶의 무늬가 방향처럼 번지는 수필을 읽노라면, 잔잔한 감동과 함께 책상으로 다가가 원고지를 마주하곤 면벽승面壁僧처럼 앉게 되는 만용을 부리게 된다.

그러나 글이 좌불坐佛처럼 무작정 앉아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안다.

체험을 통한 사색의 깊이와 넓이를 얻을 때까지, 곱디고운 정서가 찰랑찰랑 고여 넘칠 때까지 누긋이 기다리는 인내와 억지며 기교 없이 물 흐르듯 진솔하게, 솔바람처럼, 탁 트인 가을 하늘처럼 청아하고 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어찌 앉아 있다고 글이 되겠는가?

나는 또한 길게 처지거나 너무 깡똥하게 되바라져 보이지 않는 그 형식을 좋아한다. 어차피 문학이 인생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라면, 불행히 요절을 하든 천수를 누리든 기껏 고희의 나그네 길이니, 한 편의 수필을 닮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나 셰익스피어의 웅편 거작雄篇巨作들이 주는 장중한 사상이나 감동도 좋지만, 양처럼 착하디착한 찰즈 램의 날렵하고 산뜻한, 자그마한 감동은 우리를 밝은 긍정의 세계로 인도한다.

나는 내 자신이 도스토옙스키도 찰즈 램도 전혀 못됨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다. 또한 이따금 써보는 글이, 그것이 글이 못됨을 아주 잘 안다.

그러나 번잡한 세상일에 쫓기다가 금싸라기 같은 한유를 얻어 원고지를 마주하면, 멀고 먼 표랑에서 돌아와 모태에 안기는 안식과 평화를 얻는다.

그리곤 "만약 네가 혼자 있으면 너는 완전히 네 것"이라는 다빈치의 말을 새로운 감동으로 음미하며 자성의 거울 앞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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