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풀지 못하는 자물쇠 / 정은아

 

 

무의식이 말했다. 이제 끝이라고.

수많은 흰색 운동화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신발을 무작위로 마구 던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나는 신발 한 짝을 신은 채로, 나머지 한 짝을 찾고 있었다. 내 운동화는 흰 끈으로 매어져 있고, 다른 것들은 끈 없이 밋밋했다. 한쪽 다리로 휘청대며 끈이 있는 신발을 찾으려고 애썼다. 보이질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대는데, 버스가 경적을 울렸다. 조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신발 중 한 짝을 신었다. 긴 바지 아래 감춰진 짝짝이 운동화. 똑같은 흰색이라 얼핏 보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탔어도 얼떨결에 신고 온 신발 한 짝과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이 신경 쓰였다.

꿈이었다. 꿈을 맹신하진 않지만, 그 꿈은 유난히 선명했다. 스마트폰으로 꿈 해몽을 검색했다. 한쪽 신발을 잃는 꿈은 반려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신발 한 짝을 다른 신발로 바꿔 신는 꿈은 새로운 사람이 생기거나, 다른 직업이나 일을 가지게 되는 것이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미 잃어버린 반려자를 왜 다시 잃는다는 건가. 그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내 무의식까지 파고 들어간 걸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미안했다. 이런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서, 갑자기 내게로 밀려오는 걸까.

 

얼마 전, 시아버지의 부고를 문자로 받았다. 그가 없는 시가媤家는 끈이 끊어진 곳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람의 도리나 규범을 따져보자면, 당장 달려가 며느리 역할을 하고 슬픔을 같이 나눠야 한다. 하지만, 나는 시집 식구들과 연락이 끊긴 지 몇 해가 지났다. 모든 서류가 정리된 후에는, 명절에만 연락이 오가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과거의 장소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어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남편만 빠진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어떤 사건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배우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에게 그랬나 보다. 육체적 외상과 달리 정신적 외상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대처하기가 어렵다. 나만 알고 느끼는 것이라 고립감마저 느껴진다. 회복이 되었나 싶다가도 자잘한 기억이 떠오르면, 한순간에 무기력해진다. 순간순간 무너지고, 살아가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큰형님에게 다음날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밤새 뒤척거렸다. 춥지도 않은 따신 날에, 온몸이 춥고 욱신거렸다. 가슴에 통증도 느껴졌다. 카디건을 입고 웅크리고 누워도 여전히 아팠다. 힘들어하다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 4시 37분. 또 잠이 깼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불쑥 나와 버렸다. 멈출 수 없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아, 가슴을 두드렸다. 울면서도 생각했다. 도대체 이 울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이리도 슬픈 걸까. 사무친다는 말, 나는 싫어한다. 하지만 난 지금 사무쳤나 보다. 그 일이, 그 사람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놓아주질 않는지도 모른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울다가 선명해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물을 닦았다. 차가운 물로 퉁퉁 부은 눈을 눌렀다. 다시 나는 원래의 ‘고요한 나’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 앞에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한 내가 필요하니까. 실컷 쏟아낸 후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구로역을 지나갔다. 연애할 때 자주 머물던 역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있던 곳. 저 지점 어딘가에 무언가 환영幻影처럼 떠올랐다. 현실에는 그 남자도, 그 여자도 없다. 우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닮은 사람이라도 찾듯이 둘러봤다. 찾을 수 없는 우리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역에서 엄마랑 아빠가 많이 만났어.” 그 말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구로역 승강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우리는 잊힌 과거로 답사를 온 듯했다.

부천에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부천은 남편의 형제들이 사는 곳이라 언제나 그와 함께 오곤 했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초췌해진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형님이 먼 길 와줘서 고맙다고 내 손을 꼭 쥐었다. 시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새벽에 다 쏟아부어 버려서 그런가. 난감했다. 남편의 장례식 때, 시아버지가 나를 꾸짖던 기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아들 앞세운 속상한 마음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에 박혀 쓰렸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부디 거기서는 평안하시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장례식장을 나와, 인천가족공원에 갔다. 남편이 있는 주소는 만월당 ‘2-8XX번’이다. 단단한 유리로 막힌 아주 작고 네모난 공간이다. 그 안에는 봉안함과 액자가 놓여있다. 봉안함 안에는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된 그가 있고, 액자 속에는 우리 가족이 환하게 웃고 있다. 맨 아래쪽에 자리한 그를 보려고, 주저앉았다. 여전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의 나와 달랐다. 그곳은 죽은 자들만 모여있어 조용했다. 침묵한 아빠와 마주 앉은 아이들은 어색한지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다 같이 사진을 찍고, 잘 지내라고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서울역에서 배를 채웠다. 헛헛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더 채워야만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근처에 남산이 있다고 말해주니 가고 싶다고 했다. 20대 때, 서울역 근처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면, 그가 나를 기다렸다. 그와 같이 걷던 거리를, 아이들과 걸었다. ‘서울로’라는 구름다리가 보였다. 서울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아팠다. 공허를 경감시켜줄 아픔이, 오히려 반가웠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천천히 남산을 둘러봤다. 수천 개도 넘는 사랑의 자물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저 수많은 사랑의 맹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이는 자물쇠를 풀고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을까. 잊힌 자물쇠를 풀어줄 열쇠는 영원히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풀지 못하는 자물쇠는 철조망 한 귀퉁이에 매달린 채, 기약도 없이 갇혔다. 자물쇠는 굳게 잠긴 채로 녹슬고, 낡아간다. 둘이 같이 바라보던 곳에서, 아이들과 같이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발은 더 아팠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적 공허는, 남산 계단에서 비실거리는 육체 때문에 시들해졌다. 남산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보이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눈빛으로 반짝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보챘다. “제발 그만 보고 가자.”

 

며칠 후, 흰 운동화 꿈을 꿨다. 친구에게 꿈 얘기를 했더니, 시간이 흘렀으니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도 없고, 너도 너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좀 자유로워지라고도 했다. 고마운 말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떨쳐낼 수 없다. 이렇게 글을 끝내려다 다시 생각했다. 삶의 어떤 것이든 해석이 중요하다. 운동화 꿈이 글 쓰는 삶의 시작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글이 내 삶의 일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무의식이 알려준 건 아닐까. 풀지 못할 무언가에 매여 있는 삶이라도,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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