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개똥참외
정태헌
하여 어긋나게 돋아나고 말았습니다. 왼손 엄지손톱이 말발굽처럼 갈라져서요. 볼품없게 된 손톱이지만 그 속엔 제게만 거울져 보이는 무언가가 들어있답니다. 빛과 소리 그리고 색깔과 모양으로 뒤섞여서 말입니다.
산읍에서 초등학교까지는 시오릿길이었지요. 그 길을 오가기 위해선 유순이네 오두막 앞을 지나야 했답니다. 길가의 낡삭은 그 집은 주객들에게 술을 파는 주막이었지요. 유순이 엄마는 머리에 아주까리기름을 바르고 얼굴에 박가 분을 얹은 여인이었습니다. 하늘색 물방울무늬 블라우스에 쪽빛 통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지요. 육 학년 같은 반인 유순이는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 데다 제 또래보다도 숙성한 애였습니다. 그래선지 유순이의 가슴은 사뭇 봉긋했답니다.
먹장구름 낀 어느 여름날 체육 시간이었지요. 난데없이 소낙비가 한 줄금 퍼붓는 바람에 운동장에서 놀던 우린 솔개 만난 병아리들처럼 허둥대다가 비를 쫄딱 맞고 말았습니다. 남자애들은 윗옷도 없이 검정 무명바지 하나로 뛰어다녔지만, 여자애들이야 어디 그럴 수가 있나요. 교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남없이 비에 흠뻑 젖고 말았답니다. 그때 무척 궁금했던 것을 제대로 보았지요. 다른 애들하고는 유다른 유순이의 젖은 가슴을 말입니다. 개똥참외만큼은 실히 됐지요.
그즈음 교실 뒤편에선 연못을 파 금붕어를 기르기 시작했답니다. 처음 본 알록달록한 금붕어들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지요. 점심시간이면 애들이 모여들어 금붕어를 구경하곤 했는데 그날은 유순이도 끼어 있었습니다. 유순이가 건너편에 서서 금붕어들이 노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지요. 짓궂은 동출이 녀석이 노랗게 웃으며 유순이 뒤로 모기작모기작 다가서는 게 아니겠습니다. 전 목젖 너머로 마른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순간 동출이가 뒤에서 유순이의 꽃무늬 간따꾸를 밑에서 위로 훌떡 들추고 마는 게 아니겠습니까. 허리춤 양쪽에 끈이 있고 뒤에 리본이 달린 간따꾸는 요즘 원피스 같은 옷인데, 유순이는 그만 아랫도리를 통째로 보이고 말았습니다. 얼라리꼴라리, 순간 모두 깔깔거렸습니다. 유순이는 사내애들의 장난질인 아이스께끼를 당한 셈이었지요. 저도 그만 얼결에 보고 말았습니다. 박 속 같은 유순이 얼굴은 금세 울음 빛이 그렁한 채 홍당무가 되었지요. 볼우물이 패도록 입술을 감문 채 동출이를 쏘아보던 유순이는 단풍나무 그늘을 달음질쳐 교실 모퉁이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틀 후, 자연 시간이었답니다. 어쩌다가 유순이와 전 몇몇 애들과 한 조가 되었습니다. 공작품을 만드는데 유순이는 못질을 하고 저는 나무토막을 잡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데 유순이가 박아야 할 못 대신 푼수 없이 제 손가락을 그만 망치로 내려치고 말았습니다. 눈에서 번갯불이 번뜩이더니 왼쪽 엄지손톱이 벌겋게 부어오르며 이내 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지요. 망치질이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틀 전 아이스께끼를 당한 앙갚음을 또래보다 어리고 만만한 제게 했다면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었지요. 전 그저 건너편에서 얼결에 본 것뿐이었으니까요.
사흘 후 늦은 밤, 혼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답니다. 대처로 중학교에 가기 위해 늦은 밤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던 때였지요. 함께 다니던 동네 여자애들은 먼저 가버리고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또 저를 놀리려고 몰래 쪽문으로 도망쳐 버린 게지요. 무서움을 많이 탔던 저를 그런 식으로 곧잘 놀려대곤 했답니다.
그날은 달이 미루나무에 걸려 있는 명랑한 밤이었습니다. 무서우면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크게 부르며 진동걸음을 치는 게 상수였어요. 어지간히 불렀는지 목청이 아파올 무렵 유순이네 집이 가까워졌습니다. 저 멀리 깜박깜박 반딧불이 같은 불빛이 보이곤 했는데, 그건 유순이 아버지가 미루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권련을 피우는 불빛인데, 그날따라 보이질 않았습니다. 유순이 아버지는 곱사등에다 왼발을 저는 사람이었는데, 때때로 오두막 근처 미루나무 밑에서 바장이곤 했었지요. 왜 늦은 밤에 그랬는지 그게 제겐 유순이의 봉긋한 가슴 다음으로 궁금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유순이네 오두막이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발걸음 소리 때문이었을까요. 건너편 논배미에서 뜸북뜸북 뜸부기가 울어대기 시작하더군요. 그 소리가 가슴께로 짜르르 흘러들었습니다. 그때였지요. 미루나무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뜻밖에 유순이었습니다. 달빛 아래였지만 유순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답니다. 유순이는 꽈리 같은 동실한 얼굴에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늦은 시각에 유순이를 본 것은 그때 처음이었습니다.
일순, 전 어리둥절했습니다. 유순이의 행동이 너무 구꿈맞은 짓이었으니까요. 무언가를 불쑥 제 가슴 앞으로 내밀었는데, 저는 또 그것을 얼결에 받고 말았답니다. 제가 손에 든 것을 살필 틈도 주지 않고 유순이는 오두막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습니다. 개똥참외였습니다. 갑자기 뜸부기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받아 쥔 개똥참외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신발을 벗어 쥐었습니다. 그냥 달렸습니다. 왼손엔 개똥참외를 오른손엔 까만 통고무신을 쥐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요. 힘에 부쳤는지 허방을 짚었는지 무릎 꺾여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무르팍이 시큰거리고 쓰라린 걸 보니 피멍이라도 든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르팍의 아픔보다도 더 먼저 느낀 것은 왼손의 허전함이었습니다. 넘어지는 통에 개똥참외가 손아귀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가뭇없이 굴러가 버린 게지요. 밝은 달빛이라 해도 길섶 잡풀 사이로 숨어버린 개똥참외를 찾는다는 게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넘어진 것이 순전히 개똥참외 탓으로만 여겼습니다. 무르팍이 쓰렸지만 건너 도래솔 근처에 무덤이 많아서 더는 머뭇거릴 수만은 없었답니다. 욱신거리는 다리로 동구까지 달리며 하고픈 말이 멱차 올랐지만 자꾸 목에 걸렸습니다. 달빛에 젖은 뜸부기 울음처럼 입안에서만 뱅뱅 맴돌 뿐이었지요. 대신 엉뚱한 말이 입 밖으로 툭 흘러나왔습니다. 씨이∼ 나쁜 기집애-
두어 달 후, 미루나무 잎이 떨어져 갈바람에 나뒹굴 무렵 유순이네는 말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습니다. 몇 달만 지나면 유순이가 학교를 졸업할 텐데요. 늦가을 한동안 전 길가의 돌멩이만 발끝으로 툭툭 차고 다녔습니다.
반백 년도 더 지났습니다. 어긋나게 돋은 엄지손톱을 검지와 중지 안에 감추는 버릇을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손톱 속엔 아슴아슴한 뜸부기 울음과 노란 개똥참외가 갓맑은 달빛에 젖어 있지요. 달빛 자지러진 밤에는 두 손가락을 풀고 엄지손톱 속을 슬며시 들여다보기도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