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꽃으로 피고 지다 / 염귀순

 

 

시간은 가슴 저릿한 신비다. 분명 내 것이라 여겼으나 내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흐름이며, 일 년 열두 달 밤낮을 흐르면서도 실체가 보이지 않는 미스터리다. 저절로 오고 가건만 누가 훔쳐가기라도 하는 양 곧잘 강박감으로 덮치는 불가사의다. 겁나게 빠른 그 분초分秒의 위력에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될 동안 어른들은 늙어서 노인이 된다.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노인이 절뚝절뚝 힘든 걸음을 옮기고 있다. 노인 옆에는 제법 커다란 덩치의 견공이 나란히 동행한다. 희한한 건, 다리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견공도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주인과 걸음나비를 맞추는 거다. TV 뉴스 장면인데 신기하면서도 왠지 찡하다. 오랜 시간 쌓아왔을 도타운 정과 깊은 신뢰가 엿보인다. 사람이든 반려동물이든 상호 이어진 관계는, 더구나 따뜻한 관계는, 누군가에겐 생명의 끈이 될 수도 있음이니 이상하게 짠한 그들의 행보가 가슴에 닿을 수밖에. 비록 애완견일망정 사랑의 이름값을 하는가 싶다.

그렇더라도 고독한 현대사회에서 관계 단절의 통증을 견디고 있는 외로운 이름들로 와 박힌다. 가파른 세월의 속성에 펄펄하던 청춘의 진취성도 삶의 순수성도 멸하고 기력이 쇠잔해진 내 이름 때문인가.

세월은 사람 이름 위에도 곱다시 마법을 부려놓는다. 나만의 고유명사가 점점 퇴색하고 아주머니, 이모님, 선생님이라는 명사로 호명되면 짙푸르고 불꽃 튀는 날들은 아련해져간다. 색깔마저 희끗한 할머니로 불리어지면 무람없이 날뛰던 야망도 은근 겸허해진다. 자신을 한껏 주창하던 이름조차 마침내 쓸쓸해져 뼛속으로 파고든다.

움츠린 이름을 데려와 원고지 위에 반듯이 앉혀본다. 나를 다듬고 삶을 가다듬어야 할 글 길에서다. 글 제목 아랫줄 한쪽에 이름 석 자 올려놓으며 글 문을 연다. 나와 함께 태어난 이름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세상과 소통할 글제에 집중한다. 작가란 요동치는 세상살이에 덜컹거리는 이름만은 지킬 수 있도록, 아니 낯선 내가 낯익은 나를 찢고나오도록, 혼신으로 글을 쓰는 자일 테다. 답 없는 물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자일 수도 있다.

이름은 개개의 '존재'인 동시에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름을 부르면 심장이 빨리 뛴다. 그러면서 우여곡의 세월도 쌓여간다. 이름을 부르고 불리며 환희와 슬픔의 마디마디를 붙이고 자르고 지워내는 게 인생이니까.

어려운 시절을 타고난 '맏이'는 그 이름을 결코 놓쳐선 안 되었다. 부모님의 고달픔을 일찍이 보아온 터다. 덩이뿌리들을 달고 있는 구황식물이 줄기를 따라 성장하듯, 다섯 동생들이 오종종 매달린 '큰언니'라는 줄기는 그 이름을 꽉 붙들고 용맹 정진해야 할 책무를 스스로 진다. 어린 동생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큰언니'라면 쉽사리 주저앉거나 함부로 눈물을 흘려서도 아니 된다.

실직한 아버지 등 뒤에서 여고 진학을 코앞에 둔 동생이 가슴만 졸이던 때다. 큰언니인 내가 가까스로 허락을 하자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며 마음 다졌다. 빛깔 찬연한 꿈보다는 가족으로 도란도란 함께 살아갈 일이 우선이라고. 앞이 캄캄하다고 나아갈 의지마저 놓진 말자고 속다짐했으나, 막상 헌 교복을 구해다 줘야했던 발등의 현실은 끈덕지게 어둠을 몰아왔다.

스스로 길을 내려면 피멍이 드는 담금질을 각오해야 한다. 기댈 데가 없는 곳일수록 온몸으로 헤쳐 나가야 하고, 비바람이 세찬 날일수록 용기가 꺾이지 않아야 한다. 어둠도 담담히 익혀야 한다. 본줄기가 기능을 잃는다면 덩이뿌리들도 자랄 수 없다는 절박함, 그만큼 절실한 ‘이름 지키기’와 세상을 향한 숨찬 가지 뻗기인지도 모른다. 가족은 예기치 못한 시련에도 살 맞대고 살아갈 지극한 연줄이리라. 이젠 제각각의 자리에서 실하게 뿌리를 내렸지만 지금도 '큰언니'는 또 하나의 내 이름이다. 길을 가다가도 '큰언니' 소리만 들리면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지면서 어김없이 돌아보게 된다.

한세상을 산다는 일은 저마다의 이름을 꽃피우고 지우는 일. 호락호락할 리 없는 생존 현장에서 눈물겹도록 진지한 꽃으로 피고 진다. 그러기에 어떤 이름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가슴에서 복원되기도 한다. 이름이 마음속 등불이 되어주는 이유다.

수시로 발목을 휘감는 어둠을 떨쳐내던 생이 반백을 훌쩍 지나고 이순의 고개도 하마 넘었다. 휙휙 거침없는 세월을 타며 나이를 먹는다는, 인간이 겪는 가장 낯선 경험*에 허우룩해진 내 이름도 떨고 있는지 마른 어깨가 자꾸 균형을 잃는다. 졸아드는 마음을 쓰다듬어야 할 나는 또 무엇이 될까. 혹자는 인생의 무기력에서 해방시켜줄 감정이 그리움이라고도 하는데…. 그리움, 다른 그리움, 또 다른 그리움이 아픔을 극복하는 길일까. 가끔은 잊고 있던 본래의 마음자리가 만져진다. 낯선 바람과 맞닥뜨리며 잊은 줄도 몰랐던, 아득한 것들이 떠오른다.

자판을 두드린다. 이름 하나 이름 둘 이름 셋 부르며 글 길을 몬다. 눈물 글썽거려지는 이름을 부르고 단호히 돌아섰던 이름도 나긋이 불러준다. 이름을 불러본다는 건 그리움이 깔린 둔덕을 걷는 길, 이름들을 이어놓으면 내가 살아온 날들이 된다.

간간이 새로운 이름을 불러오고 드물게는 세상 밖으로 가버린 이름을 얼얼한 심정으로 보내준다. 너무 오래 부르지 않아 낯설어지는 이름도 보인다. 품어두면 속을 덥히는 밑불 한 점 되어주려나. 아마 누군가도 그의 수첩에서 내 이름을 추가하거나 삭제하거나 망설이고 있을 게다. 언젠가는 내 이름이 영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이름 하나하나가 문득 애틋해진다.

이름들의 뜻을 다시 새겨 담는다. 풍진세상을 쫓아가며 편히 기대지 못한 이름들, 고단한 시간 줄을 잡고 있는 저 벌판의 그냥 풀은 각박한 터전이라고 주눅 들지 않는다. 바람 불어 흔들린들 뭐 대수냐며 굳이 등 돌리지도 않는다. 풀은 때때로 그냥 '풀'이듯 사람은 그냥 '사람'인 것만으로도 뭉클하다. 보고 듣고 말할 수 있고, 슬픔에 울고 기쁨에 웃을 수 있다. 그리움이 있고 설렘이 있다. 글 쓸 수 있어 행복한 수필가는 수필을 쓰면서 삶을 다독이고 긍정하며, 시인은 시를 지으면서 생을 노래하고 꿈을 꾼다.

한 존재는 세상의 꽃이다. 꽃은 필 때가 아름답지만 사람 꽃은 ‘필 때보다 어떻게 지느냐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세월이 내게 가르쳐주느라 무수한 시간의 지층을 넘어왔나 보다. 크고 작은 비구름은 얼마나 많이 흘러갔는가.

글 길을 몰아간다. 시리고 뜨거운 이름들이 덜컥덜컥 와 닿는 길로 늑골 뻐근한 사람 하나 종일토록 가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칼 필레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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