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는 인제 씨나래를 날리네 / 이방주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랑이라고 말해보지 못한 사람의 구차한 변명일 수 있다. 사랑이라고 말할 만큼 그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 사람의 미치지 못한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감정은 변하기 쉽기에 고백하는 순간 의무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고백의 순간에 사랑의 진실성은 사라져버린다는 말이렷다. 이 말도 단순히 고백을 부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의 졸렬한 핑계이다. 자신의 사랑이 지순하지 못한 것을 치졸하게 변명하는 말이다. 지순하지 못한 사랑은 속에서부터 상하여 물크러지게 마련이다. 정성 없이 담근 고추장이 시큼한 맛을 내듯이, 매콤한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고 시큼하게 변질되듯이 진실은 버리고 윤리적으로나 당당해지려는 거짓 사랑의 자기변명이다.

‘사랑이라 말하면 사랑의 달이 뜬다.’ 내가 했던 이 말을 진실이라 믿는다. ‘어머니’라는 말은 어머니가 사는 집이듯이 ‘사랑’이라는 말에도 사랑이 살고 있다. 어머니라 부르면 그리움이 샘솟듯이 사랑이라 말하면 사랑에 불이 붙는다.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하면 메마른 가슴에도 촉촉하게 이슬비가 내리고 사랑이 움트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사랑이라 말하면 미미했던 내 가슴에도 사랑의 싹이 트고 꽃을 피운다.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기에 사랑이란 말에도 사랑의 혼령이 깃들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꽃은 일편단심으로 사랑을 지키려다 죽은 민들레라는 처녀의 한이 노랗게 하얗게 피어난 꽃이다. 덕이란 바보의 사랑 고백을 기다리다 죽은 처녀가 생전에 디딘 발자국마다 한이 응어리져 맺힌 꽃이다.

민들레를 사랑한 덕이라는 총각은 민들레에게 ‘사랑한다.’ 이 짧은 한 마디를 하지 못한 바보였다. 사랑이라 말을 해야 민들레도 알고 덕이 자신도 사랑을 깨닫는다. 사랑은 말을 해야 샘이 솟고 싹이 트고 불이 붙는다. 혹시 민들레도 덕이를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니 민들레는 전혀 덕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덕이로부터 고백을 받는 순간 사랑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움터서 사랑의 화산이 폭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들레 전설은 가슴앓이만 하던 덕이에게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다. 민들레의 집이 홍수로 떠내려갈 위험에 빠진 것이다. 덕이는 민들레를 집으로 데려다 부양한다. 그때라도 늦었지만 ‘사랑한다.’ 이 말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민들레는 그만 난리 통에 처녀 징발을 당한다. 바보 같은 덕이가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기에 사랑하면서도 혼례를 올리지 못한 것이다. 고백하지 않은 사랑은 이렇게 재앙의 불씨가 된다. 위안부로 끌려가기에 앞서 민들레는 날카로운 은장도로 가슴을 찔러 자결해버린다. 그야말로 민들레 뿌리처럼 곧은 사랑이다. 민들레는 답답한 덕이에게 ‘내 사랑 그대에게 드립니다.’ 이런 말 대신에 은장도를 꺼낸 것이다. 고백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고백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큰 죄악이다.

사랑은 고백해야 안다. 고백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허망한 뜬구름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장마철 는개비이다. 아니 진정 사랑한다면 어떤 두려움도 수치심도 자존심도 넘어서서 저절로 고백의 물결을 타게 된다. 고백하지 않은 사랑은 거짓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은 '사랑'을 입에 달고 산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고 나서 또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이란 말에는 사랑의 혼령이 살아있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지순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터져 나오는 사랑이란 말을 막을 수 없다.

 

나 여기 있어요

지난 겨울가뭄 목마름도

시끄러운 세상 이야기도

다 두고 갈께요

 

그냥

그대인지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저녁마다 두런거리던 사랑 이야기만

담아 갈래요

 

어디로 날아간들 어떻겠어요.

황천길 검은 강둑이거나

도솔천兜率天 도리원桃李園에 붉거나 희거나

그냥 거기 뿌리 내려 노랗거나 하얗거나 민들레나 될래요

 

나는

민들레 씨나래여요

거기서도 아직 '사랑한다'는 그대의 말씀을 기다릴래요.

기다려도 기다려도 말씀이 없으면

내 사랑 그냥 그대에게 드릴래요.

 

민들레 씨나래 날리는 봄이다. 지난겨울 지독하게 가물었는데도 민들레는 오히려 지천으로 피었다. 고백을 기다리다 지친 민들레가 밤이고 낮이고 온천지를 미친 듯 쏘다닌 발자국이다. 사랑에 목말랐던 민들레의 아픈 발자취이다. 이제 씨나래 되어 날아갈 차비를 하고 있다.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랑은 없다. 나도 그렇다. 그래도 사랑이란 말에는 사랑의 씨앗이 깃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기에 하는 말이다. 사랑만큼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양식은 없다. 그래서 사랑이란 말은 고귀하다. 미래를 짐작할 수 없지만 사랑이 영혼의 양식이라면 이제라도 고백하고 싶다. '사랑한다'하는 고백의 말만큼 고귀한 언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덕이처럼 용기가 없다. 내겐 다 벗어버릴 용기가 없다. 영혼을 살찌게 할 용기가 없어 답답하다.

민들레는 인제 씨나래를 날리려 하네. 벗어버리자. 규범이란 도포자락을 벗어버리자. 자존심이란 이름의 금관도 벗어던지고 명예란 패옥도 풀어 던지자. 답답한 나의 민들레가 ‘내 사랑 그대에게 드릴게요.’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벗어 던지자. 인제는 강가에서 산기슭에서 거친 밭에서 농투사니가 된다 해도 민들레 사랑만으로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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