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덩굴장미는 피어나도 / 남상숙

 

 

아파트 담장에 덩굴장미가 불꽃처럼 번졌다. 마술사의 주먹에서 짠, 하고 튀어나오던 장미꽃처럼 하나 둘 벌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뻗쳐오르는 정열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더는 참을 수 없는 사연 터트리듯 담장을 뒤덮어버렸다. 누리는 온통 사방에서 피어난 장미의 축제 마당이다. 차마 털어버리지 못하고 미루던 일 빌미삼아 화해하라고 채근하고 있다.

언젠가 친정에 갔다가 여학교 동창한테서 J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가슴 한쪽이 쿵,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생존해 계실 때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무심했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만 더했다. 정년퇴임하고 친정동네에서 지내신다는 말을 들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나설 수 있는 일이었다. 생각만 하다가 기회마저 영영 놓쳐버린 안타까움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른들이 언제까지나 살아계실 줄 알았을까, 허방다리를 딛던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언젠가 한 번 찾아뵈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변변치 않은 살림을 꾸려오면서 번듯하게 살게 되면 글이란 걸 쓰면서부터는 수필집이라도 한 권 내면 찾아뵈어야지, 생각했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지만 나름대로 성공(?)했을 때 찾아뵙고 싶었다. 그렇다고 알 수 없는 정체를 발판 삼아 이루고자 노력한 것도 아니면서 아직 때가 아니라는 핑계를 구실로 삼았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었나 가슴치며후회하는 것이다. 보란듯이 살진 못해도 아이들 잘 자라 제 갈 길로 가고, 활자화된 글이 적지 않으니 내 글이 실린 책이라도 보내드렸으면 대견해하고 좋아하셨을 텐데 어쩌자고 이 세월 동안 미루기만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J 선생님은 고등학교 3년 동안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고 2, 3학년 때는 담임을 했다. 문예부를 지도했는데 2학년 때 어쩌다 교내백일장에서 상을 받는 바람에 선생님이 문예부 시간에 나를 불렀다. 선생님은 원고를 주며 아이들 앞에서 낭독하라 했다. 그것은 얼마 전, 교내백일장에서 내가 썼던 원고였다. 오른편 상단에는 심사를 마친 선생님들의 서명과 날인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중 고등학교가 병설이었으니 한 교무실에서 근무하던 국어 선생님이 여섯 분이었는데 '장원'이라는 글자 옆에 선명히 찍힌, 크기와 모양이 다른 인주 자국을 보자 너무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생을 가름하는 화인(火印) 같았다.

그 해 주어진 글제가 '하늘'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첫 운동장 조회 시간이었다. 뜻밖에도 미술 선생님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전교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홀연히 떠났다. 나는 어이없는 이별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교실 담벼락에 기대어 소리 내어 울었다. 뜻밖의 행동을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얼마를 울고 나서 망연히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남빛 비단 피륙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웠다. 그 하늘 언저리에 이른 아침 나팔꽃처럼 싱그럽게 벙글던 미소와 선명한 남빛 투피스 차림의 선생님 모습이 겹쳐지면서 그리움이 사무쳤다. 여태까지 접해 보지 못한 낯선 슬픔은 가슴을 저민 듯 감당하기 힘들었으나 누구 하나 관심 두지 않았다. 울적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학교생활이 이어지는 가운데 교내백일장이 열렸다. 가슴이 뻥 뚫린 듯 견딜 수 없던 가슴앓이를 원고지가 받아주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니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자연히 미술반에 들어갔고 방과 후엔 언제나 그림을 그렸다. 가게를 운영하는 우리 집의 번다함보다는 현관 위 자투리 공간을 이용하여 만든 다락방 같은 미술실이 아늑하고 조용해서 좋았다. 또한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 머금은 미소가 터질 듯 매력적인 K 미술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다. 수첩에 빼곡하게 적은 시를 읊어주고, 조용하지만 정감어린 말소리로 책 이야기도 들려주며 우스갯소리도 잘하시던 선생님하고의 시간이 오붓하고 즐거웠다. 해마다 가을이면 교미술대회와 온양읍 내 중·고등학생들의 미술대회, 대전에서는 도(道) 미술대회가 열리니 준비하느라 방과 후에는 언제나 선생님과 어울렸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둘이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왔다. 선생님은 여관을 정한 뒤 한정식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깔끔하게 잘 차려진 밥상 앞에 마주 앉으니 어려워도 색다른 여러 가지 반찬이 무척 맛있었고 어린 마음에도 내가 선생님으로부터 우대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여관을 나섰다. "온양 촌놈 대전 시내 구경 좀 해야지" 함께 시내를 걷다가 대전에서 제일 크다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지금 은행동 NC백화점 자리에 있던 개봉작 상영한다는 ‘시민관’이라는 극장이었다. 제목이 '황야의 무법자'였던가, 서부활극 영화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생님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도무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림은 선에 들기는 하였으나 “극장 안에서 쿨쿨 잠만 잔 녀석"이라고 놀림을 받으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수줍고 어려워하는 여린 마음 웅숭깊게 보살펴 주시던 선생님, 갑작스러운 이별도 그뿐으로 지금에 이르렀고, 당시 선생님들 연세보다도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인생이라는 것이 어디 내 생각대로 기다려주거나 그리 만만한 것이더냐, 사태지 듯 흐드러진 덩굴장미가 와- 시위대의 함성처럼 나를 흔들어 깨우며 의식의 전환을 외치고 있다. 내 삶에 백기를 드는 심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과 보고 싶은 사람은 찾아보아야겠다고 뒤늦게 다짐한다. 이에 화답하듯 5월의 햇살은 폭포처럼 쏟아지고 덩굴장미가 갑자기 광채를 띄며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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