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을 걷다 / 허정진

 

 

골목길은 삶의 자궁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는 골목들, 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만들었을까? 햇볕 따사로운 곳에 외딴집, 먹을거리를 찾거나 말동무를 만나러 걷다 보면 바위를 피하고 냇물을 건너뛰며 작은 길이 만들어졌으리라.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그 길 주위로 이웃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져 마을이 되고 세상을 만들어내었다.

골목길은 만남이고 소통이다. 인연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한다. 가고 오는 숨 탄 것들의 통로이고 울고 웃는 인생극장의 여백이다. 길목을 지나는 바람의 층계마다 사람 살아가던 흔적과 풍경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그들만의 이야기와 숨결, 몸짓과 냄새들이다. 과거와 현재도, 미래와 영혼도 모두 길의 연장선상이고 삶의 여정이다.

골목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자라며 수많은 시간이 통과한 골목길은 외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안식처이며 생의 본거지이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버팀목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따뜻한 이야기와 정겨움이 삶의 뒤안길처럼 그곳에 숨어 있다. 한숨, 눈물, 웃음, 환희 그리고 희망 등이 골목 곳곳에서 벌어졌던 시간과 존재들을 기억하고 있다.

가끔 추억이 그리우면 예전 익숙했던 골목길을 찾아본다. 수십 년 전 어린 시절 고향 돌담길도 있고 대학을 다니던 뒷골목 하숙집, 신혼 시절 산동네 비탈길도 있다. 대부분은 그 방향과 형태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했거나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무조건 넓어지고 곧게 뻗어 골목 같지 않은 골목, 그나마 구석진 곳에 그 시절의 흔적이 어슴푸레 남아있어 옛 향취를 더듬곤 한다. 천천히 걷다 보면 지나온 삶이 다시 보이고, 잊고 살았던 존재가 하나하나 깨어나 나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그 골목길에서 키가 자라고 뼈가 굵어져 갔다. 친구와 이웃을 알았고, 꿈과 낭만을 키웠고, 사람 간의 인정과 의리를 배웠다. 가방은 한쪽에 모아두고 자치기, 딱지치기, 말뚝박기, 숨바꼭질, 땅따먹기 등 놀이에 대한 추억은 덤이다. 첫사랑 그 여자에게 가슴 두근대며 포옹을 해본 것도 그 골목이었다. 비 오면 진창길이고 바람 불면 흙먼지가 날렸지만 우리들의 생은 기름지고 풍요로웠다.

골목길은 곡선이다. 자연 그대로 미로처럼 얽혀 직선을 거부한다. 직진만 있는 생은 외롭고 고달프다. 쫓기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필요하면 되돌아갈 수도 있는 길이면 삶이 넉넉해서 좋을 것 같다. 신호등이나 표시판이 없는 골목길은 내 집, 내 가족, 내 친구의 냄새를 쫓아 코를 벌렁거리며 찾아가는 길이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서고 싶은 곳에 서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길이다. 처음 가는 골목길이라도 낯설지 않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그 편안함과 여유로움 때문이다.

좁은 골목길의 아침은 발걸음 소리로 시작한다. 앞집과 옆집에서 삐거덕 대문이 열리면서 하루를 내딛는 힘찬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커졌다가 작아지는 그 소리는 “저벅저벅”이었다가, “타닥타닥”이었다가, 때로는 “또각또각” 분절음을 내면서 바닥에 제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그 예리성은 규칙적이면서 단단하고, 율동적이면서 경쾌하다.

골목길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밤늦은 자식을 기다리는 뒷짐 걸음의 노인, 어깨가 늘어진 채 한잔 술에 흥얼대는 고단한 가장, 한바탕 부부싸움 끝에 이웃집으로 종종걸음 하는 여인네도 오늘의 주연들이다. 그들을 위해 웃음을, 슬픔을, 농담을, 한숨을 진심으로 받아주는 역할도 골목길의 이웃이다. 세파에 부대낄 때마다 참고 견디는 법을 배우며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껴안으면서 골목의 뼈와 심장은 더욱더 단단해져 갔을 것이다.

골목길이 날마다 사라져간다. 사람들은 크고, 넓고, 반듯반듯한 것을 좋아한다. 화려함과 편리성을 앞세워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활주로처럼 곧게 뻗어나가고 달도 별도 없는 불야성의 거리로 변하고 있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소방도로 확보를 위해, 도시 미관을 위해, 방범에 취약해서 등 이유는 갖가지다. 아직은 얼마든지 살만한 동네인데도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오래된 시간의 발자취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워지고 낯선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익숙함과 편안함,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이야기가 그 의미와 가치를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낡음이나 불편함이 결코 결핍이나 부족함은 아닌데도 삶의 본질은 외면한 채 황금도시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시골이 점점 폐허가 되어 도시로 몰려가듯 사람들은 골목길이 없는 높은 건물의 직각 벽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앞으로의 세상이 더는 골목을 품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며, 첨단과학이며, 우주통신이며 모두 골목길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가치로서 좇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그동안 인간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축적해온 세상이 자꾸만 ‘쓸데없음’이 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인간의 영혼과 정서도 메말라가고 골목마다 품고 있던 작고 소박한, 공동체적인 삶도 머지않아 시야에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걷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길이 있다. 고된 노동 후에는 밥이 달고 잠은 깊은 법, 밤이면 어둠 속에 집집이 코 고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처럼 들려오는 평화로운 마을이 결코 낭만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 따뜻한 마음이 내는 길을 밟고 산다면 그것 또한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대수필/2022 겨울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