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 / 윤승원

 

 

물소리를 읽는다. 심산유곡에서 내려오는 물의 문장은 깊고 푸르다. 계곡을 타고 흘러오는 고요한 구절 앞에 나를 앉힌다. 파르르 물비늘이 이는 수면 위로 버들치며 피라미들이 파닥거리며 튀어 오를 것 같다. 마을버스정류장에서 서원까지 가는 오솔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그늘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자지러지며 쏟아져 내리는 매미 소리가 한낮의 등물처럼 시원하다. 나는 가만히 곰팡내 향기로운 책장을 펼친다.

 

서향西向은 사색하는 집이라 했던가. 조선시대 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에 후학들이 세운 옥산서원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자계천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해 정좌하고 있는 모습은 단정한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정문인 역락문이 잠겨 있어 측면으로 돌아가니 사방 목조건물로 둘러싸인 단출한 마당이 나를 반긴다. 웅장하지 않고 소박하여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친밀감이 느껴진다. 정갈하게 빗질을 해놓은 마당이 도포 자락처럼 깨끗하다. 맞은편 담장 안쪽에서 오래된 향나무 두 그루가 그윽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댓돌 위에 서자 단청처럼 고여 있던 수백 년의 시간이 몸속으로 흘러와 잠시 아찔해진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민구재敏求齋 마루에 앉는다. 까칠하면서도 부드러운 나무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져 온다. 어릴 적 살던 초가집 마루가 생각났다. 코끝으로 훅! 곰팡이 냄새가 와닿는다. 아련하고 향기롭다. 오래된 것들은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할머니, 장독대, 고가古家. 추사 김정희의 필체인 옥산서원玉山書院 편액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옛 묵향이 내 마음속으로 발묵해 온다.

 

문득 구인당求仁堂 강단 위로 천천히 누군가 올라서고 있었다. 유건을 쓰고 버선발에 뒷짐을 진 풍채가 언뜻 보아도 스승인 듯싶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기다렸다는 듯 마룻바닥 위로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퍼져간다. 댕기 머리를 한 학동들의 눈들이 초저녁별처럼 초롱초롱 빛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요,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라.’ 나도 따라 그 뜻을 헤아려본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두보는 그의 시구에서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했다. 무릇 학문을 하는 사람은 다섯 수레에 가득 찬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책벌레인 이덕무는 방 안 가득 책을 쌓아놓고 하루 종일 그곳에서 뒹굴었다고 한다. 학문의 탐구와 정신의 성찰과 시대를 앞서가는 행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서원이야말로 한 권의 책이 아닐까? 나는 책갈피를 넘기듯 눈 끝으로 벽에 걸린 글들을 더듬더듬 읽어 내려간다.

 

자옥산의 솔바람이 마당으로 내려온다. 오후의 햇살이 쏴아! 하고 댓돌 아래로 쓸린다. 고요하던 서원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 담을 넘어오는 나지막한 물소리, 계곡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부딪는 소리, 우듬지를 떠나는 새의 날갯짓 소리. 그때의 유생들도 글을 놓고 마루에 걸터앉아 서정이 묻어나는 이곳 자연의 소리를 들었으리라.

 

독락당으로 올라가는 계곡에는 일명 너럭바위라고 하는 평평한 바위들이 깔려 있어 마치 책을 펼쳐놓은 것 같다. 그 위로 피서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팔월의 무더위를 식히고 있다. 여행은 아무래도 여럿보다는 혼자 하는 것이 제맛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고요히 침잠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사찰처럼 웅장하지 않고 단아한 조형미를 가진 건축양식에서는 유교의 절제와 예를 엿보게 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서원을 보노라면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를 새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계곡의 풍광을 바라보며 사색을 즐겼다고 하는 계정溪停 앞 냇가에 앉아 여행에 고단해진 발을 적셔본다. 발가락 사이로 찰방찰방 물줄기들이 감겼다 다시 하류로 내려간다. 탁족濯足, 옛날 선비들은 글을 읽다 더우면 계곡을 찾아 발을 담그고 더위를 피했다고 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선비의 입장으론 차마 훌훌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진 못했으리라. 그 엉거주춤한 피서법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기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계곡물에 슬쩍 발을 담그기만 하면 온몸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이때쯤이면 시 한 수가 절로 나와야 하련만. 때마침 맞은편 기슭에서 산비둘기가 구구! 구구! 나를 대신해 시 한 편을 읊는다.

 

온고지신. 오래된 것들은 따뜻하고 정겹다. 더욱이 그것이 정신을 맑게 하는 서원임에랴. 외래문화의 유입과 현대문명의 발달로 우리는 혹 소중한 문화유산을 등한시해 온 것은 아닐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자연 안에서 사유한 성리학은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문화의 중심이론이었다. 서원은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곳이며 당시의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해낸 곳이다. 서원에는 또한 당시의 고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 하니 그 가치가 새삼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선 보이는 것이 모두 책이다.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회화나무, 갈참나무, 은행나무 들이 모두 고서古書이다. 계곡에 펼쳐져 있는 너럭바위며, 키 높이를 넘지 않는 토담이며, 담장으로 난 살창과 그 아래 모시풀과 풀잎 위의 청개구리며 비단잠자리, 고색창연한 기와지붕까지. 나의 독서는 얕고 짧아 저 오래된 책들의 심오한 경지를 다 읽지 못하는 것이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폴폴 먼지 묻은 책장을 덮고 버스에 올랐다. 막바지 장마가 살짝 비를 뿌리고 있었다. 한여름 뙤약볕을 이기고 있던 벼 포기들이 시원하다며 초록 함성을 지른다. 왼쪽으로 나지막하게 모습을 드러낸 서원의 추녀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한다. 고금古今이 따뜻하게 만난 오늘, 내 몸이 한 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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