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 크루즈를 즐기던 친구에게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LA 샌페드로를 출발해 캐나다의 빅토리아를 거쳐 밴쿠버로 향하는 4박 5일 일정이 1인당 단돈 200달러라는 것이다. 게다가 50달러를 추가하면 발코니 객실로 업그레이드되는 행운까지 따랐다. 이 크루즈는 알래스카운항 시즌을 앞두고 선박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판매하는 이른바 ‘리포지셔닝(Repositioning) 크루즈’였다. 빈 배로 이동하느니 저렴하게라도 객실을 채워 운영비를 충당하는 셈이다. 최근 비싼 외식비를 생각하면 밥값에도 못 미치는 비용으로 누리는 호사여서 미안할 정도였다.
며칠 동안 육지를 보지 못하고 바다만 달리는 지루함을 염려했으나 기우였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교통체증을 걱정할 필요 없이, 밤늦도록 둘러앉아 웃고 떠들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준비해 간 똑같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마스크 팩을 붙인 채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던 시간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부지런한 친구들 덕분에 아침에는 줌바댄스와 타이치를 배우고, 저녁에는 각종 공연을 즐겼다. 각자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스트레칭과 소금 양치의 장점도 새롭게 배웠다. 누군가는 친구와의 여행이 우정을 시험하는 무대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다정한 추억만 남았다.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나이가 들수록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다. 함께 일상을 나누고 소통하니 마음의 거리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함께한다는 것’의 귀함을 절감한 시간이었다.
첫 기항지인 빅토리아의 부차트 가든은 온통 꽃들의 축제였다. 형형색색의 튤립이 만개해 있었고 소박한 꽃이라 생각했던 철쭉도 다양한 색깔과 커다란 꽃송이로 감탄을 자아냈다. 꽃향기에 취해 걷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강세인 미국 달러 덕분에 우버 비용과 입장료, 식비까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져 가성비를 따지는 은퇴자로서 마음이 흐뭇했다.
마침내 도착한 밴쿠버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모든 일정을 완벽하게 준비한 친구의 착각으로 호텔 예약이 누락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좋았다. 퀸사이즈 침대 두 개가 있는 넓은 방 하나에서 넷이 함께 묵게 되니,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이 추억은 더 풍성하게 쌓였다. 마침 워킹홀리데이를 와 있던 한인 여학생을 만나 따뜻한 격려를 건네기도 했다.
최근 밴쿠버를 다녀온 친구 덕분에 전문 가이드 못지않은 알찬 안내를 받았다. 유명 식당과 카페를 찾았고, 도심 속 거대한 스탠리 파크를 걸었다.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에서는 아찔한 공중 산책을 즐겼다. 개스타운의 고풍스러운 증기 시계와 그랜빌 아일랜드의 예술가 거리도 인상적이었다.
여행경비를 따져보면 250달러 크루즈 비용은 사실 미끼였다. 5일간의 크루즈 팁, 호텔 숙박비, LA로 돌아오는 항공료까지 더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일상에는 새로운 활력이 생겼다. 비록 미끼에 걸렸어도 함께 웃고 추억을 쌓은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값진 수확은 크루즈가 아니라 친구들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