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엔찬타!” / 박금아

 

 

이른 아침,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세 시면 일어나는 어머니가 날이 새기를 기다려 한 전화였다.

“오늘, 니가 댕긴다는 곳에 나를 좀 데리고 가 주라.”

엉겁결에 그러시라 해놓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도착했다. 친지 결혼식에 왔다가 동생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자양동에서 신림동까지를 금세 달려온 걸 보면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했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그즈음 나는,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후원단체에서 봉사자로 있으면서 일에 파묻혀 지내다시피 했다. 휴일도 없이 가족 모임에도 빠지기 일쑤여서 모두가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걱정하던 차에 급기야 어머니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러 온 사건이었다. 어머니는 내 등 뒤에 앉아 식사도 거른 채 꼬박 하루를 지켜보고는 다음날엔 명동성당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해 아버지 기일에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깜짝 놀랄 선언을 했다.

“내도 인자부터 성당에 댕길란다.”

대대로 불교를 신봉해 온 밀양 박씨 문중의 종부인 어머니가 개종을 하다니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평생을 부처님께 의지하며 살아오셨는데 절에 다니지 못할 무슨 까닭이라도 생긴 거냐며 묻자 어머니는 주지 스님에게도 사정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얻었다며 단호했다.

딸 중 넷이 천주교 신자이지만 어머니에게 개종을 권할 생각이라곤 해본 적조차 없었다. 오히려 어머니의 종교를 따르는 딸이 한 명도 없음을 죄송해했다. 섭섭하지 않으시게 한 사람쯤은 절에 나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가졌을 정도였다. 훗날 어머니는 개종 이유를 궁금해하는 지인들에게 말했다.

“절이든 성당이든 죄 안 짓고 살 수 있습니까? 그래도 오데든 댕기야 하는데, 딸들이랑 한 군데로 댕기고 싶어서예. 너이(넷이) 바꾸는 것보다야 혼자인 내가 바꾸는 기 숩지 않겠습니까?”

이듬해, 영세하던 날 자식들이 모였다. 사위, 며느리에 손자, 손녀까지 축하하러 왔으니 잔칫날이건만 기념사진을 찍는 어머니의 옆얼굴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자식들을 객지로 떠나보내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뜬 뒤로는 혼자 고향 집을 지키며 매일 절을 찾아 불공드리고 도반들과 어울려 지내기를 위안으로 삼았는데 생면부지의 성당으로 가겠다니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을까 싶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십 리 길을 혼자 다닐 일은 걱정이었다. 좀 더 생각해보시라고 했지만 어기찼다. 그렇게 완강하기는 처음이었다.

평생 주장이라고는 없어보였다. 어머니는 층층시하의 어른이나 동기간에서는 물론, 자식들에게도 고집스레 의견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모성애가 갖는 선견지명으로 딸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보장되는 전공을 권했지만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도, 당신이 주선하는 혼처를 마다하고 성에 차지 않는 짝을 데리고 왔을 때도, 대대로 배 사업을 이어온 집안에서 이방 신앙인 천주교를 믿는다고 했을 때도 잠시 서운함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자식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어머니는 이제 신앙마저 내려놓은 것이었다.

영세식을 마치고 집을 떠나오던 날 저녁, 집 앞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할 말이 없었다. 잘 계시라는 말조차 못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게엔~찬·타!”

철없던 날에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어 고집을 부렸을 때나, 철들어 그 뜻을 알고 죄송해할 때면 늘 후렴처럼 해주던 말이었다. 아무리 불편한 상황일지라도 어머니의 그 한마디면 모든 일이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노랫말처럼 들려서 할 수만 있다면 그 말을 악보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게엔찮다”에 대한 첫 기억은 어린 날 여름방학을 하고 섬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를 찾아다니다 엎어졌던 일이다. 어디선가 나타난 어머니는 무르팍에 박힌 사금파리를 뺀 자리에 빨간약을 바르고는 상처 속으로 “게엔~찬·타, 게엔~찬·타”를 불어넣어 주었다. 지나고 보니 그 말은 이제는 다 아팠다고, 곧 새살이 돋을 테니 울지 말라던 기도였다.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면 어디선가 가만히 들려오던 어머니의 응원가였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부쩍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듯하다. 고향에 혼자 있지 말고 서울에 와서 같이 살자고 자식들이 성화를 부릴 때도, 기름값 아끼지 말고 보일러 온도 올려서 따뜻하게 지내시라 할 때도, 아프면 참지 말고 택시 불러서 병원에 가시라 할 때도 어머니는 박자 한 번 틀리지 않고 노래하듯 되뇐다. “게엔~찬·타….”

나도 어느새 옛날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서인가. 이제야 알겠다. 어린 날엔 우리를 달래는 줄로만 알았던 그 말이 실은 자신을 따독여 온 위무의 언어였다는 걸. 당신의 아픈 생에 대한 지극한 긍정이었다는 걸. 어머니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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