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집 / 심선경
비 온 뒤 개망초가 마당을 죄다 점령했다. 오래전부터 깨져 있는 듯한 유리창은 세월의 먼지 옷을 입어 이제 더는 투명하지 않다. 모서리가 뜯겨 나가고 한쪽 다리가 내려앉은 거무튀튀한 평상 위로 눈 찌푸린 햇살 한 조각 깜빡 졸다 미끄러진다. 장독대 위엔 빈 옹기 몇 개 엎어져 나뒹굴고, 죽은 감나무 마른 가지 사이로 거미들이 촘촘한 그물을 쳐놓았다. 쩍쩍 금이 간 작은방 황토벽 위로 담쟁이덩굴이 가늘고 긴 팔을 뻗어 나가는데, 문짝이 떨어져 나간 안방까지 가 닿으려면 또 하세월 지나야겠다.
부드러운 바람의 숨이 드나들었을 들창문은 이제 문살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한낮에도 어두운 부엌은 이 집의 내력을 알고도 함구하려는 듯 모르쇠로 일관한다. 툇마루는 오래된 관절이 삐걱거리듯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기이한 소리를 내고 먼지 땟국물이 끼어 쇠락한 기운으로나마 끈적하게 발목을 잡는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으로 훅 풍겨온다.
마치 공포영화 촬영지처럼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놓은 세트장 같다. 최대한 궁핍하게 보이려고 낡은 가구들과 너절한 옷가지들을 작위적으로 널어놓은 듯해 보인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다니, 아무리 집을 잘 고치는 사람이 와도 이 집은 회복 불능으로 판정할 것 같다.
이 집주인은 무엇이 그리 급해서 가재도구며 가방이며 구두까지 다 버려두고 여길 떠났을까. 다시 돌아올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긴 했을까. 살림은 그대로 있고 사람만 증발해 버린 듯한 이 집은 시간이 부풀 때마다 형체가 조금씩 허물어가는 듯하다.
동네에는 폐가가 여럿 보인다. 퇴직하면 꼭 한 번이라도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어서 시골 빈집을 구하러 여러 군데 발품을 팔았었다. 마당까지 차량 진입도 가능하고 집 방향도 남동향으로 좋은 편이라 찾아왔건만 아래채는 당장 철거해야 할 듯하고 본채는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하다. 서서히 조금씩 허물어지는 이 집은 허기에 지친 야생고양이들이 배회하다 굽은 등으로 누워 잠들 수 있는 은신처다.
석면 슬레이트 지붕 아래, 서까래든 문창살이든 사람의 온기가 떠난 집의 모든 것들은 서서히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푼다. 빈집에 붙은 골격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일시에 폭삭 주저 앉으려는지 언젠가는 도달할 붕괴의 순간을 고대하고 있는 듯하다.
굳이 문 열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저 속의 삶을 속속들이 알 것만 같은 집. 먼저 살던 주인도 희망이 없어 버리고 간 집에 새 주인이 될지도 모를 내가 들어와 그 이력을 더듬어본다. 누군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 때부터 터진 벽을 바르고 마당에 모기를 쫓으려 말린 쑥대를 가져다 태웠을 이 곳, 한때는 초록의 꿈이 성성했었을 이 집이 이제는 여기 살던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물러서 있다.
이미 묵은 것들,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은 누군가에겐 꽃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기도 하고 상처의 흔적으로 이 집에 들러붙기도 하였으리라. 이 집에서 살다 간 사람들이 오후의 적요 속에서 툇마루에 단잠을 청하면, 세속의 모든 욕망도 덧없이 사그라들며 고요히 정화되지 않았을까. 고즈넉한 풍경을 안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이 홀로 늙어가는 저 외딴집은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날 저무는 이 낡은 집 마당에 소란스럽지 않게 피고 지는 작은 꽃들의 그윽한 향내를 맡으며 삼라만상의 소멸과 생성을 깨닫는다. 허물어져 가는 담장과 삭아가는 기와지붕 틈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새 생명이 움이 트는 기적을 나는 이곳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늘 새롭고 좋은 집들만 들여다보던 내가 안목이 조금 넓어진 걸까. 요즘은 낡고 오래된 것들에게 더 애착이 간다. 새롭고 화려한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아서라는 게 옳을 것이다. 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에게 친숙하고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어쩌면 우리는 탄생과 멸절, 새것과 낡은 것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출발점은 어디부터였을까.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며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다.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의 접점에 현재는 일종의 통과점으로서 존재하는 것인가. 시간 속을 동시에 걸어가는 그것들이 어찌 우월과 열등으로 따져지며 심지어 선악과 미추로 구분될까. 한때는 그 모두가 최선이었다.
재개발 구역에 들어 이름있는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아랫마을에도 으리으리한 저택부터 고만고만한 주택들이 많았는데 시공사에서 보상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사람들이 목욕 바구니를 들고 오래된 공중목욕탕에 드나들었고 마을 입구 평상에 할머니 여럿이 나와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들로 왁자지껄했었다.
얼마 전, 대문에 빨간 페인트로 숫자가 표시된 집부터 용역업체 사람들이 철거를 시작했다. 마당의 석류나무, 목련나무는 미리 다 파내어 옮겨갔고 문짝 뜯어내고 세간 들어내니 멀쩡했던 집들도 정신을 놓은 말기 암 환자의 몰골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다. 집에도 생이란 게 있다면 맨 처음 주춧돌을 놓았을 때를 탄생이라 하고, 철거대상 낙인이 찍혀 지붕이며 기둥까지 불도저로 밀어버려 처참하게 무너지는 시점을 죽음으로 보아야 할까. 집의 죽음을 사람의 장례식처럼 경건하고 숙연하게 바라보는데 인적이 끊긴 폐가는 이제 인간의 반경에서 벗어나 버렸다. 추녀 밑 빗물이 만든 둥근 발자국들과 바람이 불어와 잠시 앉았던 자리는 이미 이승의 영역이 아니다. 폐가에 방치된 것들은 삶의 덧없음을 민낯으로 보여준다. 폐가가 무너지면 집터만 남을 것이다. 어쩌면 집터마저 잡초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깊어진 생각만큼 가슴에 품을 것이 더 많아진 이곳, 나는 종일 안팎이 허물어지지지만 여전히 작은 생명들이 숨을 쉬고 바삐 움직이는 폐가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