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 다시 태어나다 / 김성진
느낌이 이상하다. 분명 일어날 시간인데 아직 새벽 같은 묵직한 이 느낌, 아침마다 들리던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새들이 이사라도 간 것일까. 시계가 고장 났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흐릿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찌릿 전류가 흐른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데 영점 일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거실의 블라인드를 올리자 유리창이 흐릿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아! 비가 오고 있다. 오늘은 아들과 산을 가기로 한 날인데….
산을 좋아한다. 특히 지리산을 좋아한다. 정확히 헤아려보진 않았지만, 백 번은 넘게 지리산에 올랐던 것 같다. 아무리 산을 좋아한다지만 우천 산행은 하지 않는다. 날씨에 따라 지리산이 얼마나 괴팍스러운지 알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고 소파에 잠시 누웠는데, 살짝 잠이 들고 말았다.
“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날씨가 개었어요.”
못내 아쉬웠는지, 잠이 든 나를 아들이 깨운다. 밖을 보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햇빛이 쨍하다. 일기예보를 검색하니 지금부터는 계속 맑을 거라고 한다. 현재 시간 아홉 시, 아직 중산리 코스는 가능하다. 중산리는 집에서 30분이면 도착한다. 간단히 장비만 점검한 채 바로 나선다.
군데군데 구름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언제부터인가 지리산은 나에게 산 이상의 의미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지리산을 처음 올랐던 때도 지금의 내 아들 나이 때였다. 내가 내 아들에게 지리산을 알려주었듯, 내게 지리산을 처음 알려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첫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지리산처럼 넓고 큰마음을 가지길 바랐을 것이다. 인내와 고통이 있어야 정상을 밟을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중산리를 출발해 네 시간 남짓, 어느새 천왕봉이다. 사방으로 뻗은 산줄기가 갈기 휘날리며 달리는 말 떼처럼 보인다. 제석봉으로 발길을 돌린다. 제석 능선은 연하선경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구름이 휘젓고 지나간 자리, 군데군데 죽은 고목이 목을 빼고 있다. 오래전 도벌꾼들에 의해 불타버린 구상나무 고사목이다. 앙상한 빈 가지에서 불길 속 처절한 몸부림을 느낀다.
그때였다. 앞서 걷던 아들이 고사목 하나를 유심히 보더니 나를 불렀다.
“아버지, 저기 저 고사목이 다시 살아났어요!”
죽은 나무가 다시 살아나다니,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인가. 반신반의하며 보는데, 고사목에 정말 푸른 잎이 돋아 있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고목이 아니었던가. 가까이 가보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주위의 잡풀 덩굴이 고목을 타고 올라가 마치 죽은 나무가 잎을 틔운 것처럼 보였다. 습한 날씨 때문에 이끼까지 끼어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저 나무는 다시 태어났으니 오늘이 새로운 생일이네요. 그런데 나무는 왜 죽은 날을 기념하지 않고 심은 날을 기념하는 걸까요?”
아들만의 비유법이고 역설법이다. 사실 어제는 아버지 기일이었다. 유난히 할아버지를 잘 따르던 아들이었지만, 제사라는 유교 문화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생일은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의미니, 돌아가신 분을 축하할 수는 없잖아….”
“슬픔만 더할 것 같아요. 할아버지와는 즐거웠던 기억만 나요.”
제사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생일처럼 좋았던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뜻밖의 한마디에 살짝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러고 보니 성인(聖人)이나 위인들을 기리는 날도 대부분 돌아가신 날이 아니라 태어난 날이다.
꼭 그렇진 않지만, 살아가면서 아이들을 통해 어른이 되어간다. 산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게 하고 싶었던 것을 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들에게 산을 가자는 말을 더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렸을 땐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다. 우리 집의 가난은 모두 아버지 탓이라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 입을 옷은 늘 교복과 체육복뿐이었다. 6학년 가을 운동회를 앞둔 때였다. 체육복이 낡아 무릎과 팔꿈치 부분에 구멍이 났다. 새것으로 사달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졸업하면 체육복은 입을 일이 없다며 기워 입으라고 했다. 그날 저녁, 먼 친척 아저씨가 쌀을 얻으러 왔다. 아버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주의 쌀을 절반이나 퍼 주었다. 그 쌀값이면 체육복을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집안의 종손인 아버지는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항상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다. 누군가 아버지를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 말했을 땐, 모두 위선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런 아버지가 싫어 당신의 다정한 말에도 나는 언제나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아버지의 행동이 모두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을 돌아보면 삶의 절정은 목표를 이루었을 때가 아니라 아등바등 힘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우치고부터였다. 성공한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고민과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성공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고통을 돌아본다면 가난이나 고통은 오히려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바탕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내게 용서를 구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갑자기 떠나셨다. 어쩌면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늘 있던 기회를 내가 잡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당신은 평생 저 고목처럼 버텨 냈으리라. 늘 주변의 어려움을 보살피며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 내셨으리라. 세월에 몸은 여위어 가면서도 삶의 굴곡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았으리라. 가슴이 비어가면서도 말없이 안고 계셨을 아버지의 외로움이 가늠된다.
남을 누르지 못하고 베풀 줄만 아셨던 아버지. 돌아보니 산허리 한 그루 고목처럼 느껴진다. 자식에겐 부모란 고목 같은 존재인가 보다. 저기 제석봉 고목은 죽은 지 오래지만, 주위의 넝쿨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좋은 부모는 자녀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된다.
기억의 편린들이 제석봉에 내린다. 비바람의 시련만큼 강해진 고목, 험악한 지형일수록 고목은 넘어지지 않는다. 산은 나무를 잡고, 나무는 산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아픈 만큼 나무와 산은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된다.
능선을 휘감던 바람이 잦아든다. 생과 사를 잊은 고목이 바람 속에 우뚝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잡아주는 고목,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