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론 (나의 수필론) / 김응숙
나는 암탉이다.
첫 문장을 써놓고 골똘히 바라본다. 짧고, 의미도 간결해 첫 문장으로 제격이지 싶다. 근데 다시 읽어보니 사람인 내가 암탉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와 암탉 사이가 너무 멀다.
어린 시절 나는 외갓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장독대의 눈이 녹기가 무섭게 양계장을 청소하고, 날개에 갓 깃털이 돋은 삼십여 마리의 병아리들을 채워 넣었다. 그때부터 물과 모이를 주는 것은 나의 소임이었다. 병아리들은 쑥쑥 자랐다. 솜털이 빠져 민들레 갓털처럼 양계장을 휘휘 돌아다녔다. 꽁지깃이 나고 봉숭아꽃색 벼슬이 맨드라미꽃처럼 붉어지면 중닭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산란용 사료부대를 헐고 푸성귀를 썰어 부지런히 모이를 주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았다.
그날의 풍경은 이렇다. 문을 열자 작은 창으로 흘러든 햇살이 마치 실개울처럼 양계장 안을 휘돌고 있었다. 빛의 물결은 모이통 아래 알받이에 놓여있는 세 개의 작은 알들을 씻고 있는 중이었다. 양계장은 밝았지만 나는 순간 정적을 들이켜며 전율을 느꼈다. 꾸룩꾸룩 대며 암탉의 검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알들은 흰 조약돌처럼 빛났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알을 쥐자 손바닥에 따끈한 열기가 새겨졌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화인 같은 열감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나는 어떤 의문에 사로잡혔다. 암탉은 어떻게 해서 알들을 낳는 것일까. 사실 그 답을 얻는 방법은 가까이에 있었다. 다만 용기가 좀 필요했다고나 할까.
외할머니는 닭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가끔씩 암탉을 잡았다. 식구들의 여름철 보양식이었던 셈이다. 외할머니가 닭 날개를 휘어잡고 우물가로 향하면 나는 여름 더위와는 또 다른 열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마루에 엎드린 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죽였다. 그러다 호기심에 못 이겨 살짝 벌려놓은 손가락 사이로 암탉의 갈라진 배를 보고야 말았다.
내장을 들어낸 암탉의 뱃속에는 찰흙으로 빚은 것 같은 노란 포도송이가 들어있었다. 그것들은 핏기가 감도는 내막 속에 성글게 맺혀 있었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크기가 커졌다. 마지막 것은 거의 계란만 했다. 만약 암탉이 살아있었다면 다음번 알이 될 것이었다. 암탉의 뱃속을 보았다고 해서 그 신비한 답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것들을 보는 순간 나의 내면에 포도알 같은 심상(心象)이 맺히고 있다는 것을어렴풋이느꼈다.
언제부터 크고 작은 심상들이 맺혀왔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그 심상들은 나와 타인의 상처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상처에 맺힌 심상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떠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좀 예민한 사람이었다. 환경도 썩 좋지 않았다. 오래된 가난은 수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것들은 어두운 골목에 부는 찬바람으로, 묘혈에 내리는 싸락눈으로, 어머니 관 뚜껑을 내려치는 망치 소리로, 아버지에게서 나는 짙은 니코틴 냄새로, 남몰래 훔쳐 먹던 케이크의 아릴만큼 달콤한 맛으로 심상을 남겼다.
가끔씩은 환희와 경탄으로 인한 심상도 생겼다. 상처 입은 짐승은 숲속으로 가서 스스로를 치유한다고 한다. 나도 자연에 의지하는 때가 많았다. 여명이 비치는 매화꽃을 보았다. 아스팔트 틈새에 피어있는 민들레도 보았다. 키를 넘는 억새밭에 몸을 숨기고 핏빛 같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을 고단한 날갯짓을 하며 나는 새떼도 보았다. 영롱한 구슬처럼 심상이 맺혔다. 다시 말해 나의 오감이 어떤 것에 집중되어 있거나 활짝 열려 있을 때 심상은 저절로 맺히곤 했다.
평소에 그것들은 내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점점 커지며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시간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도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물론 개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언제 알이 되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선가 청탁이 오고 마감이 가까워지면 급속히 커지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습작 시절 나는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렸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안이 텅 비어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써놓은 글들은 하나같이 배설물에 불과했다. 나는 신경성 대장염까지 앓아가며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 ‘백열전구’라는 글이 한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병아리 부화기에 관한 글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무형의 글이 유형의 알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글 한 편이 손바닥으로 감지할 수 있는 알 하나가 되었다. 서너 편이 쌓이자 제법 중량감이 느껴졌다. 나는 글을 모아놓는 폴더의 이름을 ‘알바구니’라고 붙였다. 상실감이 사라졌다.
나는 내 글이 계란 같기만 하였으면 한다. 허기는 지고, 시간은 없을 때 후딱 해 먹을 수 있는 계란 후라이면 좋겠다. 소풍 때 가져간 삶은 달걀이라도 좋겠다. 김밥에 들어간 지단이어도 좋겠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라도 존경해 마지않는 에디슨처럼 누군가가 가슴으로 내 글을 품어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킨다면 더없는 영광이겠다.
어느 독자에게서 당신의 글은 몸으로 쓴 것 같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머리로 썼다면 지성을 인정받은 것이고, 가슴으로 썼다면 인성을 칭찬받은 것이리라. 그럼 몸으로 썼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요즈음 계란은 세척과 살균을 거쳐 시장에 나온다. 그래서 냄새가 없다. 근데 갓 낳은 계란에서는 특유의 비린내가 난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조향사가 오래 묵은 땀 몇 방울에 갓 솟은 눈물 한 방울을 섞어 만들어 낸 좀 큼큼하고 싸한 향이다. 알에 묻어있는 암탉의 체액이 마르면서 나는 냄새다. 아마 내 글에서도 날 것의 비린내가 좀 나는 모양이다. 평론에 별 전문지식이 없는 나는 그저 그렇게 그 평을 받아들인다.
조류독감이 휩쓸고 간 뒤 달걀 값이 올랐다. 알을 낳을 암탉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서른 개 한 판에 3600원하던 것이 10,000원가까이 하자 사람들은 사재기까지 해 가며 아우성을 쳤다. 중학교 가정 교과서에 완전식품이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나는 계란이 그렇게 필요한것인지는 처음 알았다. 냉장고에 서너 알 남은 계란을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긴 무엇이든 귀해지면 비싸진다. 그래봐야 한 알에 300원 남짓이니 비싸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한 판에 7200원 정도 한다. 따져보면 계란만큼 싼 것도 드물다.
내 글도 싸다. 가뭄에 콩 나듯이 원고료를 받는다. 내 글이 싼 이유는 너무 흔하거나, 불완전해서 상품 가치가 없어서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전문지식이 없는 나는 그저 그렇게 여긴다. 거기에 보태어 이런 한심한 생각도 한다. 계란이 보석처럼 비싸다면 누가 그걸 먹을 수 있겠는가. 공기처럼 물처럼 정말 소중한 것들은 공짜가 많다. 달걀만 해도 그걸 낳은 암탉과 알의 신비를 생각하면 턱도 없는 가격이 아닌가. 내 글이 과연 계란만큼의 값어치가 있는가 하고 말이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단어와 문장을 쪼아 먹는다. 단어는 풋보리처럼 탁 터지는 것을 좋아하고, 문장은 지렁이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즐긴다. 가끔 푸성귀도 먹는데 그럴 때면 속이 시원해진다. 마치 식물의 상상력을 흡수한 것 같다. 푸성귀들은 내가 낳을 알의 이미지를 만들어주며 산란을 촉진한다. 단어와 문장은 책 속에 가득하고, 푸성귀는 산책길에 널려있다.
내가 외부에서 섭취하는 것들은 알의 껍데기가 된다. 심상은 아무리 자라나도 무형의 무엇이다. 그것을 밖으로 내어놓으려면 껍데기가 필요하다. 단단하면서도 얇아서 내용을 드러내면서도 안팍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식을 했는지 딱딱하고 두꺼운 껍데기가 되기 일쑤다. 심상은 단어와 문장에 갇혀 숨도 쉬지 못하고, 이미지는 훼손된다. 나는 그 알을 깨버린다.
인간에게 알을 깨야 한다고 외친 작가가 헤르만 헤세던가. 작가에게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은 한 세계이다. 알을 깨면 그 세계가 무너진다. 냉정하게 말하면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은 축복이다. 알이 깨지는 소리는 새로운 알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무너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인식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인식은 껍데기이다. 전날 내가 먹은 사료일 뿐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암탉이 자연스럽게 뱃속에서 알을 만들어 내듯 나의 내면에서도 당연히 새로운 심상들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다. 나를 믿으며 알을 낳고, 나를 의심하며 알을 깨뜨리고, 또 다시 새로운 알을 낳는 것이 암탉이 된 작가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이제 마지막 문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암탉이 지척에 와 있다.드디어 마침표를 찍는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암탉이다.’
<수필미학 202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