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소금 없는 일상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만큼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소금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것이 김치이다. 김치 없는 식생활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다. 반찬이 없을 때에도 김치 하나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수 있으니까. 소금 성분은 염화나트륨으로 정육면체의 결정체로 존재한다. 물에 녹으면 짠맛을 낸다. 나트륨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성분으로, 몸속에 양이 증가하면 배출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소금의 섭취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어도 안 되니,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에겐 김장을 담그기 위한 배추 절이기 할 때의 소금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김장을 담그기 위한 일이 보통이 아니지만, 아직은 사 먹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김장을 직접 하는 번거로움을 선택하게 된다. 고추를 미리 사서 닦아야 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며칠을 건조해야 한다. 또 방앗간에서 가서 빻아야 한다. 김장 배추도 포기 수가 많아지면 시장에서 집까지 가져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무게도 만만찮다. 무도 썰어 넣고, 여러 가지 양념도 준비해야 하고, 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서 김장 절차를 모두 쓰는 것조차 힘이 든다. 매년 하는 일이지만 배추 절이기도 쉽지가 않다. 어떤 해는 오래 절여 배추가 너무 짜기도 하고, 어떤 해는 배추가 제대로 절여지지 않아 뻣뻣한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런 수작업들이 이제 귀찮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김치 먹을 생각을 하면 쉽게 김장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나에겐 여행에 대한 기억으로, 소금하면 우유니 소금 호수가 떠오른다. 몇 년 전 남미 여행에서 볼리비아에 있는 그곳에 갔었다. 차로 몇 시간을 달려도 계속되는 커다란 하얀 소금 천지이다. 바다였던 호수의 물이 마르면서 증발하여 거대한 소금사막이 되었다. 가장 두꺼운 곳의 소금 두께가 백 미터가 넘는다고 하니 엄청난 양의 소금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소금에 반사되어 지구에서 가장 큰 거울을 만들어낸다. 석양이 질 때 하늘과 땅이 대칭으로 데칼코마니가 되어 만들어낸 환상적 풍경을 잊을 수 없다. 하늘에서와 발아래서 같이 물 드는 붉은 석양의 모습은 내 생애 최고의 장면으로 남았다.
가장 짠 호텔에서도 잠을 잤다. 호텔 전체가 소금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신기하게도 벽, 바닥, 소파와 침대도 모두 소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벽을 이루고 있는 소금 벽돌은 돌처럼 단단하고 견고하였다. 벽면에는 소금을 이용한 여러 형태의 조각물도 있었다. 온 주위가 소금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벌레도 없고 왠지 마음까지 청결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천 미터 정도에서 본 밤하늘에는 온통 소금을 뿌린 듯 별들이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소금으로 둘러싸인 듯했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은 소금과 같이 여러모로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리라. 역사적으로도 소금이 그만큼 소중했다는 것이 아닐까. 소금으로 인해 인간 문명도 발달하고 음식의 변질도 막아주고 우리 삶에 필수적인 물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미네랄 성분도 제공하고 건강에 중요한 성분이다. 하지만,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니, 과다한 염분 섭취는 피할 일이다.
많이 먹어도 문제이고, 너무 적게 먹어도 안 되니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닐까. ‘적당히’란 말은 말하기는 쉬운데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말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배추 절이기에서 소금의 양과 시간의 조합을 잘 맞추어야 잘 절여지듯이, 우리 인생살이도 적당히 절여내고 숙성을 시켜야 제대로 된 맛이 나는 것이 아닐까. 너무 절여버리면 풀이 죽어 힘이 없어지고 기가 꺾여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반면에 삶의 질곡을 경험하지 못해 본 사람은 절여지지 않은 배추처럼 뻣뻣하고 유연하지 못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지 생각한다. 소금 절임의 정도가 김치의 숙성에 영향을 미치듯이, 우리의 삶에도 적당한 숙성이 필요하다는 마음이다.
숙성된 삶은 어떤 것일까. 노래 가사에서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걸 듣기 좋은 말로 익어간다고 한다. 우리의 삶도 오래 시간 동안 익어서 충분하게 잘 만들어진 상태가 되면 좋으리라. 살아온 삶의 시련과 고난, 분노와 좌절이, 부패된 삶이 아닌, 더 굳건한 삶이 되도록 만드는 변화가 아닐까. 지난 시절의 아픔이나 상처에도 태연해질 수 있고, 현재의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이다. 또한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맞설 수 있는 의연함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 엄마의 배 속에서 생명을 잉태하며 태어났다. 그곳은 적당한 염도를 가진 작은 소금 바다와 같다고나 할까. 생일날 먹는 미역국이 어쩌면 생명 탄생인 그 바다에 대한 향수는 아닌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존재하는 지구도 엄청난 양의 소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커다란 바다를 품고 있다. 우유니처럼 바닷물이 증발해버린다면 거대한 두께의 소금이 쌓일 것이다. 땅속도 암염의 형태로 많은 소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는 어쩌면 하나의 소금별일지도 모른다.
소금은 자신을 용해시켜야 제 역할을 해낸다. 소금 자체로는 배추를 절일 수 없다. 제 몸을 온전히 녹여내어 형태가 사라짐으로써 맡은 바 일을 해내는 것이다. 소금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남을 변화시켜 낸다. 우유니 소금호수에서는 물에 녹은 소금과 결정체의 소금이 같이 있었다. 그리하여 투명과 불투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몽환적 풍경을 보여주었다.
익어가는 삶이란, 삶 속에 자신을 완전히 녹여내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흔히들 연극배우나 가수가 무대에서 자신을 완전히 녹여내듯 공연을 하고 노래한다고 말한다. 녹여내고 익어간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눈물에 소금이 담겨있고, 땀에도 소금이 담겨있는 이유와 의미가 무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 모두는 소금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