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속 잎 틀 때
유숙자
집 근처 공원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사랑하는 연인처럼 마주 보고 있습니다.
가끔 들러서 쉬기도 하고 나무 사이를 걷기도 했으나 나무가 워낙 높게 올라가 있어 언제나 밑동만 보았습니다. 우람하고 키가 큰 나무들이 하도 많으니 내 키 정도에서는 잎도 볼 수 없었습니다.
공원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고, 그네도 있고, 시소와 미끄럼틀이 있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겨 찾습니다. 때로 그네를 타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치기를 부려봅니다. 그네가 흔들릴 때마다 나무들이 쏜살같이 달음질치고 구름이 숨바꼭질합니다. 한낮을 떠들썩하게 누볐을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해 질 녘에는 군데군데 모여 앉아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담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로 아르메니언 노인입니다. 저녁 한때에 볼 수 있는 한가로운 정경입니다.
이 봄에 서울에서 친구가 왔습니다. 친구는 사전에 철저하게 정보를 듣고 왔습니다. 해가 저물면 절대로 문밖을 나가서는 안 된다고 가족들이 신신당부하더랍니다. 이 동네는 위험하지 않다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친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해 질 무렵에 걷던 것을 아침 시간으로 옮겼습니다. 저녁놀을 볼 수 없어 아쉬웠으나 아침 산책은 신선한 공기가 상쾌해 새로운 맛이 있었습니다. 혼자 걸을 때와 달리 친구가 있으니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돗자리와 커피와 스낵을 준비했습니다. 등받이 의자도 실었습니다. 공원은 우리가 주인입니다. 아이들도 노인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평평하고 푹신한 잔디 위에 돗자리를 폈습니다.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 족히 서너 시간이 지난 것 같습니다. 피곤했습니다. 등받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기지개를 켜려 팔을 올리고 고개를 젖히는 순간, 내 눈에 보인 것이 은행나무에 막 돋아나는 여린 잎이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잎들, 우리가 앉았던 곳이 마주 선 은행나무 사이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습니다. 팔을 쳐들고 높이 뛰어 보았습니다. 은행나무가 하늘처럼 높아 잎이 손에 닿지 않습니다. 나는 멋쩍게 웃었습니다. 나에게 은행잎을 전해 주었던 친구가 곁에 있기에 잠시나마 옛 생각에 흔들렸던 내 마음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오래전, 서소문에 있던 병원에 친지 한 분이 위암으로 입원했습니다. 번화한 거리에 있는 그 병원은 문을 나서면 그대로 큰길로 연결되었습니다. 4월 초순의 밤은 아직 꽃샘추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무척 쌀쌀했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며 가망 없다는 친지의 모습이 눈에 밟혔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쉽게 택시를 잡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며 서 있었습니다. 그때 내 어깨를 슬쩍 건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길이 협소하고 워낙 번화가여서 행인이 건드린 줄 알았습니다. 방향을 잡고 몸을 돌리는 순간 하마터면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습니다. 주춤거리다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습니다.
“오랜만이군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거의 20여 년 만에 그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안정감 있는 중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언제 오셨어요?”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해 겨울, 창경궁 식물원 근처를 수없이 돌며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떠나간 사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떠나 보내야 하는 내 아픔을 그는 알기나 했을까요. 이듬해 그가 월남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 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통역 장교로 근무한다는 소식. 그 후 본교에서 재직하다가 스톡홀름 대학의 교환교수로 출국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가 내 앞에 서 있습니다.
가족 행사가 있어 잠시 귀국했다고 합니다. 세월의 강물 따라 너무 많이 흘러와 버린 지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수인사를 마치고 나니 말문이 막혔습니다. 서 있기가 민망했습니다.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때, 오색찬란한 네온사인을 덧입고 까만 비로드가 깔린 하늘을 향해 작은 손을 흔들고 있는 은행잎을 보았습니다. 이제 막 속잎이 튼 듯 아주 작았습니다. 얼마나 신선하고 신비하게 보였는지요. 나는 그에게 아름다운 풍경화 한 점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저것 좀 보셔요?”
하늘 사이로 보이는 작은 이파리들이 살랑거리며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찰나적으로 스쳐 가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별똥별이 빛의 꼬리를 길게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하늘에 걸려있는 무지개의 영롱함을 볼 때, 아침 이슬이 잠시 반짝이다 스러질 때, 아쉽습니다. 짧은 만남은 긴 여운을 남겨 줍니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고 5년 만에 잠시 귀국했을 때 친구가 나에게 조그마한 선물상자를 주었습니다. 그가 5년 전에 전해 주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습니다. 투명한 셀룰로이드 사이에 파란 은행잎 일곱 개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제 막 돋아난 것같이 작고 여린 속잎입니다.
그날 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은행잎을 두고, 그도 차마 떠나기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에게 주었던 풍경화 한 점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을 보면. 그도 나처럼 은행나무 속 잎 트던 밤을 가슴에 담아 둔 것 같습니다.
먼 기억 속의 은행나무를 친구와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다. (2003)
참 아름답고 아련한 은행나무 잎 추억이네요. 이루어 지지 않은 사랑은 이처럼 애닯고 아프지만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한 편의 소설이랄까 ... 수필 속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여운이 오래 남을 글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