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 염희순

 

 

빨간 신호등 앞에 정차하여 무심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었다. 속이 다 시원해졌다. 좀 있으니 하얀 선이 하늘에다 I 자를 그리고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출발하면서 힐금힐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선은 비행기 꼬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비행 쇼를 하나 보다. 커브를 돌며 또 한 번 왼쪽 창으로 보니 막 ♡가 그려지고 있는 참이었다. 아하, ‘I love!’

도로변 빌딩들이 높이 솟은 곳은 하늘이 가려져 더 이상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사거리 신호등에 다시 차가 섰다. 운전대 앞으로 얼굴을 쭉 내밀고 차창을 통해 하늘을 훑어보았다. yo… ‘you!’ 신호등이 바뀌어 액셀을 밟는 발에 경쾌함을, 동시에 내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번졌다. 누군가 사랑 고백을 하는 중이었다. 그 넓은 하늘에 사랑의 편지를 쓰다니.

시드니에서는 비행기가 하늘에 글씨를 쓰는 것을 가끔 본다. 대개는 상업광고였다. 교회에서 전도용으로 쓰는 Jesus ♡ 같은 것은 보았으나 처음 보는 ‘I ♡ you’는 아무 상관없는 내 마음에도 핑크빛 물이 들게 했다. 누구에게 보내나? 프러포즈하는 걸까? 차를 세우고라도 완성된 문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갈 길이 바빠 애석하다. 혹시 싶어 백미러로 뒤창을 보았다. El… 얼마 뒤 다시 쳐다본 하늘에는 ‘Elsa’가 쓰여 있었다. 그렇구나, 엘자에게 프러포즈하는 거구나. 사랑한다고 결혼해 달라고.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지? 남의 일인데도 내 마음까지 환하게 밝아지는 걸 보니 사랑이란 참 좋은 것이구나 싶었다.

차도가 휘면서 좌측 저 멀리로 문장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이미 I는 희미해졌고 ♡는 찌그러지면서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 맞다!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나 굳게 사랑을 맹세했던 그(I)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듯이 사랑(♡) 또한 희미하게 연기처럼 사그라지는 거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동영상으로 찍어 놓았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운전하느라 좋은 기회를 놓쳤다. 사실 사진으로 찍어 놓는다고 저 사그라지는 ♡를 붙잡아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안타까워진다.

피식 웃으며 다시 쳐다본 하늘에는 fror… n… nr… m이 써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후훗 웃음소리가 나왔다. 어떤 남자일까? 참 낭만적이네. 아니야, 저 광고를 의뢰하려면 돈 꽤나 있는 남자겠지? 아마 자기과시형인 아랍 남자일 거야. 별별 상상을 다하며 다시 올려다본 하늘에는 Da가 쓰여 있었다. Dan인가? David?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었다. 짧은 연애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대로로 접어들면서 시속 70㎞로 내달리며 백미러를 슬쩍 훔쳐보았다. 마지막 글자가 궁금해서였다. d 자였다. ‘Dad?’ 오 마이 갓! 순간 가슴이 찡해왔다.

어떤 아빠가 사랑하는 딸에게 저런 편지를 의뢰할까? 아니 몇 살짜리 딸에게 저런 메시지를 보낼까? 어린 딸은 아닐 것이다. 그 나이 땐 곰 인형이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일 테니 말이다. 삐뚜로 나가는 사춘기 딸? 아니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맞을 성 싶기도 하고…. 글쎄 모르겠다. 자식을 낳아 길러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언제 자식의 존재가 가장 애틋할지 알 리가 없다. 더구나 나는 아버지와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어서 더더욱 깜깜이다. 그런데 불현듯 생전에 나를 찾아오시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말년에 치매를 앓으셨다. 함께 살고 있는 아들 얼굴도 못 알아보시고, 며느리며 손자들까지 기억에서 지우셨다. 유일하게 막내딸인 나만 기억하셨다. 때때로 오빠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피스텔로 나를 찾아오시곤 했다. 그러면 한밤중에 온 가족이 파출소로 아버지를 찾으러 가곤 했다. 퇴근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면 경비실 아저씨가 “오늘 아버님 왔다 가셨어요. 따님 직장 갔으니 이따 저녁에 오시라고 해도 한참을 엘리베이터 앞에 있다 가셨어요.” 했다. 나는 창피했다.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옷가지 몇 개를 묶어 어깨에 메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눈치도 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계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향 가신다고 늘 옷 보따리를 싸서 메고 다니셨다.

치매 이전의 일도 생각났다. 중3 때 고등학교 준비로 학원에 몇 달 다닌 적이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가는 길에 아버지랑 골목길에서 만나곤 하였다. 경로당에서 오시는 줄 알았다. 어느 날은 학원 가는 도중에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저 멀리서 따라오고 계셨다. 경로당 가는 골목은 이미 지나쳤다. 여러 번을 겪고 나서야 ‘아! 아버지가 나를 미행하시는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다 큰 딸년이 밤에 다니는 것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아픈 추억 하나가 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고입 체력고사 예비소집일이었다. 일정이 끝나고 여의도광장까지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자전거를 타고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두컴컴해서야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는 빗자루를 들어 종아리를 치셨다. 부모님이 가장 화내는 일은 연락 없이 집에 늦는 것이다. 6남매를 낳아 위로 넷을 어려서 잃고 남매만 남았으니 오죽했으랴. 다음 날 체력장에서 체육복 반바지 아래 드러난 시퍼렇게 멍든 종아리로 눈길이 쏠리는 걸 느끼며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했던지.

옛날 노인네들이 다 그렇듯 아버지도 자상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아버지에게 데면데면했다. 돌아가신 지 22년이 된 오늘에야 처음으로 아버지 생각에 울컥했다. 나도 하늘에다 편지를 써볼까. 계신 곳에서 가까우니 우리 아버지가 보실지도 모르잖은가. 비싸려나?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사랑해요, 희순.’ 이 글씨를 조종사에게 보여주면 그리기가 너무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 뻔했으므로.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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