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것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 정성화
‘장례식장의 온정’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어느 상주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생전에 좋아하던 된장찌개와 닭볶음탕을 식당 두 곳에 스마트폰 앱으로 주문했다. 이에 된장찌개집 주인은 음식과 함께 조의금 3만원 보내왔고, 닭볶음탕집 주인은 음식 값을 받지 않겠다는 메모와 함께 음식을 보내왔다.
기자가 취재에 나서자, 두 식당 주인은 부디 식당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칭찬받자고 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1만 2900원짜리 된장찌개를 팔면서 조의금 3만원을 보낸 이유를 묻자 식당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음식 값 결제를 취소하면 상주에게 그 문자가 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음식 값을 그냥 받게 되었고 그 대신 조의금을 보내게 된 겁니다.” 닭볶음탕집 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돈을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훈훈한 기사였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이기적이긴 하지만 타인을 연민하는 능력도 갖고 태어났다. 이것이 오랜 세월 인류를 공존하게 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연민이야말로 인류의 근간이 되는 감정이다. 우리말 중 가장 따뜻한 낱말을 하나 고르라면 나는 ‘연민’을 택하겠다. 연민이란 다른 사람의 서러움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을 때 가능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도 잊지 못할 식당이 있다. 그 날 저녁은 두 군데 과외를 가야했는데, 차가 밀리는 바람에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 무렵 나의 밥벌이는 나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두 번째 수업을 마치고 나니 밤 9시 반이었다. 집에 돌아올 힘도 없었다. 간판도 없이 출입문에 ‘즉석국수’라고만 적힌 작은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오십대 나이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허겁지겁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일어서려는데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가씨가 하도 맛있게 먹어서 내가 국수를 조금 더 삶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머니는 허리를 숙여 가스불을 돋우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혼자 가게를 꾸려가느라 온종일 동동거렸을 아주머니, 그래서 밤이면 부은 발등을 주무르다 잠이 들 아주머니가 나를 위해 다시 국수를 삶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의 고단함을 아주머니가 함께 견뎌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날 내가 먹은 것은 그냥 국수가 아니었다. 어른에 대한 신뢰가 되살아나고 베푼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귀한 음식이었다.
이따금 이런 일들이 내 삶에 일어났다. 그 때마다 메말라가던 내 마음에 물기가 스몄다. 뜻밖에 다가온 친절과 배려, 예상치 못한 양보와 나눔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주 다른 재질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과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은 이런 감동들로 인해 우리의 삶은 조용히 균형을 잡아가는 게 아닐까.
장례식장과 국수가게의 온정에서 보았듯이, 소소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짊어진 짐과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 그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누구는 비트코인으로, 누구는 부동산 투기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데 이런 기사를 보고나면 그 쪽으로 기울었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의 ‘정신적 눈금’이 재조정된다.
나는 이제 큰 것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내가 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제주일보 2022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