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 손창현

 

 

바람결에 풍경 소리만 들릴 뿐, 산막은 적적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나무도 새들도 월동에 들어갔다. 사람도 추위에 움츠려드니 따뜻한 차를 찾게 된다. 커피, 녹차, 보이차 등 카페인 성분이 든 것은 피하다 보니 겨울에는 주로 칡차를 마신다. 칡은 차라기보다 음료수에 가깝다.

주전자 가득 끓여놓고 물 마시듯 마신다. 칡은 먹기가 편하다. 쌉싸름하면서도 끝맛이 달짝지근하다. 목구멍으로 삼키고 나면 단맛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칡 한 잔을 마시고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황량한 산막 주변에 환삼덩굴, 칡덩굴 등이 어지럽혀져 있다. 지난여름 한때를 강성하게 보낸 것들이다. 입안으로 칡차 한 모금을 넘기고 마른 칡덩굴을 바라보노니 칡의 단상에 빠진다.

여덟 살 되던 해의기억을 더듬어간다. 양손으로 희뿌연 안개를 헤쳐 나간다.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운전석 옆에는 할머니, 두 살배기 누이동생이 앉았다. 누이, 남동생과 나는 한껏 실은 이삿짐 틈바구니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던 어머니가 운전석 옆자리에 마저 탔다. 아버지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차는 천천히 고향 마을을 빠져나갔다. 덮개가 씌워지지 않은 트럭의 짐칸은 추웠다. 굽어진 도로를 돌 때마다 멀미가 났고 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내 어린 기억은 이렇게 고향을 떠나왔다.

고향을 떠나기 전 마지막 열흘간의 기억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운동장에서 앞으로나란히를 하던 코흘리개들, 교문 앞에서 팔던 칡을 씹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추운 언덕길. 짧게 간직된 고향에서의 어린 기억이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추억이 내 가엾은 유년의 그림자였다.

이삿짐은 외가댁 사랑채에 널브러졌다. 외가댁은 본채와 사랑채 두 개로 나눠져 있었다. 대문 옆에 붙은 사랑채는 방이 모두 세 개였다. 한 칸은 외증조할아버지가 기거하고 계셨고, 그 반대쪽으로 붙은 방 두 칸은 우리가 지낼 방이었다. 할머니는 사돈댁 신세를 어려워했다. 아버지는 이사한 지 삼 일 후에야 외가댁에 찾아오셨다.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자 한숨만 푹푹 쉬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성이 대부분이었다.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도박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도박하는 아버지를 찾아다녔고, 아버지는 오히려 화만 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도박 장소를 찾아갔다.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찾으면 어머니는 밖에 머물고 어린 내가 아버지를 불렀다. 한두 번은 집으로 모시고 왔지만, 다음에는 내가 가도 소용이 없었다. 도박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가산이 말라 갔다. 더 머물렀다가는 아버지도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집안의 어른들과 궁여지책 끝에 어머니는 이사를 결단했다.

내 이민 같은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사 온 곳은 대부분 K성 씨들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타성他姓은 우리 집뿐이었다. 아이들은 함께 놀다가 불리해지면 형님 아니면 아재를 불렀다. 그들이 찾는 형님과 아재가 내겐 없었다. 어머니마저 늘 부재였다. 외톨이인데다가 따돌림까지 당했다. 외가댁에서 1년쯤 살다가 가까운 동네로 독립해 나갔다. 일곱 집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전답이 없었던 아버지는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으니 겨우 끼니만 이어갈 뿐이었다. 어머니는 밀양에서부터 하던 목화 장사를 이사한 후에도 계속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가 없는 집은 빈집 같았다. 특히 학교 행사를 할 때나, 아이들에게 따돌릴 때면 더욱 그랬다. 내가 중학교 입학할 무렵, 목화 장사를 그만두고 가까운 마산을 오가며 쌀, 고추, 양파 등 농산물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가 조금씩 나아지자 마산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전학이 어려워 혼자 외가댁에 맡겨졌다. 외가댁에서의 생활은 불편했다. 한시라도 마산으로 가고 싶었다. 방학 때는 마산에서 지냈다. 방학이 끝나기 전 전학을 시켜달라고 종용했다. 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학교를 알아보고 있었다. 시험을 쳐서 입학하던 당시 전학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별 우열이 심했다. 도심지에 있는 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변두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했다. 초등학교에 이어 두 번째 전학이었다.

중학교에서는 텃새가 더욱 심했다. 통학하기도 먼데다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이방인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촌놈이라고 놀림도 많이 당했다. 서럽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마산으로 이사를 한 뒤에도 집이 없었던 터라 남의 집을 전전했다. 스무 번 가까운 이사를 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였다. 하나의 파도를 받아내고 나면 새로운 파도가 밀어닥쳤다. 조금 적응한다 싶으면 또 이사를 했다. 새로운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건 식물도 싶지 않다. 어린 나이에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오랫동안 상처가 되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고향을 찾았다. 타지에서 받은 설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고향을 찾으면 집안의 할머니들, 아재들, 아주머니들도 반겨주었다. 먼 친척들이었다. 하지만 사촌처럼 가깝게 지냈다. 진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고향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만약 고향에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내 또래들이 사십여 명이나 되었고 종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골목대장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겨울 창밖의 언덕배기는 물론 산비탈에도 칡덩굴이 나무를 칭칭 감고 있다. 아무 데나 던져놓아도 살아남는다. 가다 장벽이라도 생기면 타고 오른다. 저 부드러운 풋것의 강인함은 어디서 올까. 고향 부모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화초처럼 살았더라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어린 시절 전학과 이사를 전전하며 살았던 환경이 나를 더 단단하게 이어준 끈은 아니었을까. 칡덩굴은 유연하면서도 질기다. 칡의 질김 이면에는 부드러움이 있듯이 부드러움이 강인함을 만들어 주는 것일 게다.

고향에서 살지 못한 아쉬움은 늘 한처럼 나를 짓눌렀지만, 이제 그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 칡 한 잔의 단상도 함께 내려놓는다.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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