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과 죽음에 대한 상념 가득…"세월호,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질책도
작가 김훈(76)은 요즘 버리는 연습 중이다.
고령과 건강 문제로 그 좋아하던 산에 오르는 것도 못 하게 되자 등산 장비 중 쓸만한 것들은 모두 후배들에게 넘겼다.
그런데 책을 버리기는 쉽지만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고 한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김훈은 신작 산문집 '허송세월'에서 허약하고 유한한 육신에 갇힌 존재로서 느끼는 시간의 덧없음을 담담히 말한다.
남은 시간은 길지 않고 그래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는 것이 유한한 존재의 도리라고 여기는 것 같다.
딸에게는 "잘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아들에게는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의 유언을 남기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고 썼는데,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작가는 근래 몇 년간 심혈관 계통의 병으로 고생하며 치료를 받아왔다고 털어놓았다.
반세기를 피운 담배는 이미 끊은 지 꽤 됐고, 오랜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없어선 안 될 존재였던 술도 의사의 질책을 받으며 자의 반 타의 반 끊었다.
하지만 "가끔씩 술 마시던 날들의 어수선한 열정과 들뜸"이 때론 그립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이따금 저녁에 동네 술집에 모여서 술 마시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삶이라는 고해(苦海)의 아름다움을 곱씹는다.
지인들의 죽음과 본인의 병고를 겪으며 늙음과 죽음에 관한 상념은 부쩍 많아졌다.
그에게 죽음은 무거운 게 아니라 가벼운 것이다.
죽음이 가볍기에 사람은 가볍게 죽어야 한다.
그래서 자꾸만 집에 쌓인 물건들을 내다 버린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고무 호스를 꽂아서 붙잡아 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그렇다고 삶과 죽음의 허망함 속에만 침잠해 있는 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형 사회적 참사와 산업현장의 잇따른 재해 사망사고 등에 관해 꾸준히 질책하는 발언을 해온 그는 이번 산문집에서도 준엄한 목소리를 보탰다.
10년 년 참사 당시 기울어진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고 그는 잘라 말한다.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한국의 근대사는 가야 할 길이 멀고 발걸음이 다급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초개(草芥·쓸모없고 하찮은 것)로 여기는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것이 지나친 말이라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거니와, 국가와 사회가 인간 생명을 유린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목표와 사명을 설정해 놓고 그쪽을 향해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는 돌진을 강행해 온 것이 사실이므로 나의 말은 다소 거칠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
"참사 이후 10년 동안 한국 사회는 다시 세월호로부터 탈출했고, 기우는 선체 내부로 들어가서 사태의 핵심부와 직면하지 않았고, 희생자들을 소수자로 몰아서 고립시키고 타자화했다.
이것은 제2의 세월호 탈출이었다.
"
'칼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등 역사적 인물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 인간적 고뇌와 당대의 풍경을 처연히 그려낸 소설들로 한국문학에서 독보적 위상을 점한 작가는 소설 외에도 산문집 '자전거 여행', '밥벌이의 지겨움', '연필로 쓰기' 등에서 보여준 밀도 높은 사유의 탐미적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다.
이번 산문집은 그러나 그런 '김훈표 미문'보다는 늙음의 허망함 속에서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 사회에 준엄한 질책을 가하는 시대의 어른 같은 면모가 많이 읽힌다.
작가는 그런데도 자신의 말에 대한 불신을 떨쳐내지 못한다.
"말을 하려다가도 말이 뜻을 저버릴 것 같아서 미덥지 못하고, 이 귀머거리들의 세상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말들은 흩어져서 할 말이 없어진다.
글을 쓰다가도 이런 쓰나 마나 한 걸 뭐 하러 쓰는가 싶어서 그만둔다.
"(산문 '말년'에서)
"이런 쓰나 마나 한 걸 뭐 하러 쓰는가"라고 했지만, 바로 그 머뭇거림에 김훈 문학의 힘이 있음을 그의 글을 아끼는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남. 336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