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누운 나무 / 이은희
눈이 쌓인 저수지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많다는 소리이다. 나무와 가을에 보자는 약속을 까마득히 잊고 지낸 것이다. 그러다 문득 드러누운 나무가 떠올라 방죽골을 한겨울에 찾았다. 그것도 코끝이 찡하고 얼굴에 반점이 피어오르는 추운 날 말이다.
혹여 물에 빠질까 봐 몸을 바싹 움츠리고 발자국을 따라 나무 곁으로 다가간다. 여름날 잎이 무성했던 나무의 모습은 흔적 없고, 무수한 잔가지만 하늘을 향하여 삐죽삐죽 솟아 있다. 반쯤 드러난 나목의 굵은 줄기는 물기를 털기 위함인지 햇볕을 쐬고 있다.
저수지가 꽝꽝 얼어 왕버드나무를 자유자재로 담을 수 있어 좋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매얼음 속에서 '나, 여기 있어요.'라고 나무가 수런거리는 듯하다. 그래, 내 발밑 물속에선 버드나무와 물고기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으리라.
순간 도산서원 앞마당에 누운 왕버드나무가 떠올랐다. 그 나무와의 첫 만남도 신록이 무성한 초여름, 사람들은 대지에 드러누운 버드나무 곁을 무심히 빠르게 스쳐지나 화려한 모란 무더기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나무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향기로운 꽃향기에 취하여 사진을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강줄기를 향해 길게 드러누운 신기한 나무에 마음이 꽂혀 움직일 수가 없엇다.
버드나무가 물가나 습지에서 자란다 하지만, 동안에 내가 본 버드나무는 가늘고 긴 가지를 치렁치렁 물가로 내려트린 꼿꼿이 선 나무였다. 오래된 나무가 대지에 드러누워 자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기햇다. 나무에 관하여 더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여러 각도에서 그의 자태를 사진에 담아 폴더에 가둬 두었던 터였다.
방죽골 저수지에서 담아온 사진 카페에 올린다. 눈 위에 몸이 반쯤 드러난 나무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땅속에 묻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폭설에 고목이 쓰러진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내가 나무의 이력을 말하지 않으면 그가 누운 자리가 얼음 속이라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숨탄것들은 사계절을 지켜봐야 그의 모습을 제대로 안다고 했던가. 사람도 마찬가지일 성싶다. 생면부지인 사람의 속내를 어찌 첫 대면에 알 수 있으랴. 수십 년간 곁에 둔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여름 한 철 본 나무의 생애를 어찌 안다고 보았다고 말할 수 있던가.
저수지 왕버드나무를 찾지 않았다면, 나도 나무를 무심히 스쳤으리라. 나와 나무 사이에 흘렀던 애잔한 마음도 영영 잊히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원의 나무와 방죽골 나무와 다른 점을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속에 드러누운 방죽골 나무와 다르게, 도산서원 나무는 대지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무의 우듬지가 강가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햇다.
예전 서원의 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강물이 흘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 자리를 대지로 만드느라 성을 쌓듯 흙으로 매웠다고 한다. 땅속에 묻힌 버드나무 일부분까지 상상한다면, 아마도 거목일 게 분명하다. 아마도 나무의 바람은 귀향이지 싶다. 나무의 우듬지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이 도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과 흙은 토양이 전혀 다른 물성이다. 대지에 발을 묻고, 머리를 강가로 향한 나무는 귀향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확인한 셈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종종 있잖은가. 조금만 관심을 둔다면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세계, 그 세계를 알려면 적어도 나무의 이력과 그 자리에 역사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만 했다.
세상은 모든 일은 드러누운 나무처럼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내가 다를 수 있다. 물론 비슷한 부분도 있으리라. 그러나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듯, 그의 마음을 읽는 일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나 또한 곰곰이 뜯어보면,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있다. 남들이 나를 말할 때 카리스마 넘치고 당당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지만, 내가 보는 나는 소심하고 가녀린 갈대처럼 흔들릴 때가 잦으니까. 강한 척 나를 포장한 것은 변명 같지만,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다.
그래,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 보호쯤으로 해두자. 내면은 이해타산을 초월한 자연에 은거한 선비다운 면모가 되고 싶어 애쓰고 있잖은가. 내면의 차이를 어찌 눈에 보이는 자태로 표현할 수 있으랴. 내 깜냥으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차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지구만큼의 크기, 아니 우주의 넓이만큼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드러내는 일, 그리고 시각 차이를 줄이는 일, 아마도 그건 내가 죽도록 해야 하는 작업, 글쓰기이리라. 정녕 그 일을 사명처럼 해야 한다면,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엄청나다. 그러려면 우선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내면의 도를 닦아 심안과 혜안을 넓혀야 하리라.
왕버드나무는 아마도 세상일을 달관한 자, 아니면 모든 걸 비우고 자연으로 귀향한 자일 것 같다. 그리 생각하니 나무가 그리워진다. 땅풀림머리 전, 매얼음 속 수런거리는 버드나무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번에는 눈보다 마음을 먼저 활짝 열고 보련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무는 나에게 말을 걸리라. 소리 없는 수런거림에 내 가슴은 벅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