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값에 보태려고 쓴 글 / 정성화   

 

 

 

우리 집 밥상에는 두부와 콩나물로 만든 음식이 자주 등장한다. 음식을 만드는 나의 식성이 아무래도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양이다. 어릴 때 가장 많이 했던 심부름이 두부나 콩나물을 사오는 것이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두부가 부서지거나 콩나물을 담은 봉지가 터질까봐 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손끝에 남아 있는지, 요즘도 식료품 가게에 가면 나도 모르게 두부와 콩나물 봉지 쪽으로 손이 뻗는다.

두부는 사방을 고요하게 한다. 두부에 어울리는 서술어라면 '수더분하다'가 아닐까. 네모반듯하고 매끈하며 미백색을 띤 두부는 모양부터 소박하다. 두부를 헤아릴 때 쓰는 '모'의 어감도 다소곳하다.

두부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어떤 재료나 양념과도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청국장찌개 속에 들어간 날은 청국장의 쿰쿰한 맛을 끌어안고, 갈치찌개를 만난 날은 제 부드러운 속살로 갈치 비린내를 다독거린다.

이가 채 나기 전부터 먹기 시작해서 이가 다 빠져버린 후에도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죽더라도 제사상을 통해 계속 먹을 수 있으니, 두부는 그야말로 '전천후음식'이라 할 수 있다.

단단한 콩이 부드러운 두부로 변해가는 과정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콩은 일단 물속에 들어앉아 하루쯤 묵상에 잠긴다. 콩은 마침내 자신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맷돌 속으로 들어간다. 변신을 위해서라면 제 몸이 가루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이내 걸쭉한 콩물로 변한다.

가마솥으로 자리를 옮긴 콩물은 뜨거운 불기운을 받으며 부르르 끓기도 하고 가마솥 바닥을 설설 기기도 하지만, 이 모든 걸 애써 참아낸다. 습기 찬 소금에서 저절로 생긴다는 짜고 쓴 간수를 받아들이는 과정, 이것이 변신을 위한 마지막 고통이다.

네모난 두부 틀 속에 들어앉아 굳기를 기다리는 동안, 두부는 제 몸에서 또닥또닥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때 두부는 지난날 콩잎에 떨어지던 봄비 소리나, 여름날 콩대를 후려치던 소나기 소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두부가 굳는 동안 틀 아래로 떨어지는 물소리와 두부가 덮고 있는 베보자기,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두부의 숨소리,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기에 두부는 태생적으로 고요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삶의 여정도 두부와 닮은 데가 있다. 아무리 단단한 사람이라 해도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다 보면 마음 한쪽이 깨지거나 물러지게 된다. 어느 날은 제 몸이 바스러질 줄 알면서도 맷돌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또 어떤 날은 삼키기 힘든 간수를 들이켜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고통을 이겨냈을 때 두부가 '오듯이', 우리 삶의 형상도 그렇게 두부처럼 오는 게 아닐까. 하얀 접시에 담긴 두부 한 모가 사방을 고요하게 한다.

콩나물은 늘 내게 묻는다. 대야 위에 큰 시옷자 모양을 한 쳇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그 위에 거무스레한 콩나물시루가 얹혀있었다. 시루 위엔 언제나 검은 보자기가 덮여 있었는데, 그 보자기를 열어젖힐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와 어머니뿐이었다. 콩나물이 자라려면 햇빛을 가려주어야 한다는 설명도 없이, 어른들은 무조건 보자기를 열어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어른들 몰래 하루에도 몇 차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곤 했다. 콩나물 보자기를 열면 노란 얼굴들이 일제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눈에는 콩나물이 까치발을 한 채 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느다란 콩나물대에 비해 무성히 나있는 잔뿌리를 보면, 콩나물이 물을 찾아 얼마나 많은 발돋음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루에 물을 부어주고 나면, 이내 시루 아래로 물이 떨어졌다. 콩나물을 닮은 팔분음표(♪)가 시루 아래로 쏟아져 나와, 방 안을 콩콩 뛰어다니는 듯했다.

맑고 가벼운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콩나물은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쓰린 속을 달래주는 해장국에 대부분 콩나물이 들어가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 콩이나 콩나물 시루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콩을 불리기 위해 물을 부었을 때, 물 위로 동동 뜨는 콩은 일단 제외다. 체중 미달이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잠수훈련을 받은 콩은 콩나물시루에 배치 받는다.

겨우 이틀 사이에 몸이 두 배로 불어나고 머리에 눌러쓴 투명 모자까지 벗겨진 콩은 왠지 뚱해 보인다. 사흘째 되는 날, 작고 하얀 뿌리가 나오면서 콩은 '쉼표'모양이 된다. 나날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벅차 잠시 숨을 돌리려는 것일까. 캄캄한 시루 안에서 콩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언제 물이 지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서서 잠들고 잠깨면서 일주일을 견디고 남녀, 콩은 어느새 어엿한 콩나물이 되어 있다. 콩나물을 보면서 나는 사물놀이에 나오는 상모돌리기를 연상한다.

콩나물의 생김새도 그렇지만, 콩의 발랄함이 콩나물로 하여금 상모를 돌리게 할 것 같아서다. 그래서인지 콩나물을 먹고 있으면 내 마음도 같이 들썩거리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지인은 콩나물을 보면서 물음표를 연상한다고 했다. 그 또한 공감 가는 얘기다. 이제껏 먹어온 콩나물의 양을 생각해 보니, 내 속은 이미 물음표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지금쯤은 내가 세상에 온 이유나 세상에서 꼭 해야 할 일을 알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 답을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도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 생을 수직 상승시키려고 애썼을 콩나물의 마음을 짐작이나 해 볼 뿐이다.

콩나물무침에다 두부 넣은 된장찌개, 그리고 콩자반까지 올린 오늘 저녁 상차림은 거의 콩씨네 종친회 분위기였다. 그동안 내 몸에 들이부은 콩만 해도 수십 자루가 넘을 것이다. 나는 과연 콩값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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