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에서 시작하리라 / 이정림

 

 

겨울 산을 오른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또 가을대로, 산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절기의 산보다 겨울의 산은 독특한 매력으로 나를 이끈다. 

겨울 산에 서면, 늘 나는 내 육체가 서서히 비어 감을 느낀다. 잎사귀를 떨어내고 가지로만 서 있는 나목처럼, 내 몸의 살과 피가 그대로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겨울나무는 그 추위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섰다. 그것은 그 몸에 끊이지 않고 도는 수액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 산에서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된다. 그리고 나무의 수액과도 같은 나의 정신과 만난다. 좀 더 일찍 그것과 마주하지 못한 것은, 나무의 무성한 잎들처럼 내 정신을 덮어 가리는 그 현란한 위선과 가식으로 해서였다. 그것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의 참 모습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곳과도 같고, 교양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자신을 가리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의 본질이 확연히 파악되지 않는 이치와도 같다.

겨울산은 이 모든 가식을 벗겨낸다. 그리고 알몸과 같은 순수로 정신과 만나게 한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그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겨울산은 나와 정신을 만나게 해주고 또 그것을 정화시켜주는 종교와도 같다. 내게 산은 바로 거대한 교회인 것이다.

겨울 산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저절로 눈에 눈물이 돈다. 조금도 슬픈 것은 아닌데 그냥 눈물이 고인다. 차가운 공기가 눈을 씻어 주기 때문이다. 눈뿐만 아니라 폐부도 씻어 내준다. 그것은 가슴이 아린 명징(明澄)이다. 

마음을 가리고 있던 혼탁한 꺼풀이 벗겨지니 눈이 맑아진 만큼 마음도 맑다. 맑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맑은 마음을 지닐 수 있고 맑은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맑을 수 있다. 눈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겨울산은 눈을 맑게 해주는 정수(淨水)와도 같다. 내게 산은 바로 거대한 샘물인 것이다. 

겨울 산에서 나는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걸음을 옮긴다. 추위로 다리는 빳빳하지만 돌아갈 수 없으므로 산을 오른다. 오르지도 않고 돌아갈 요량이라면, 처음부터 산에는 오지 않았어야 한다. 올라가야 한다는 한 가지 목표가 있기에 나는 추위를 가르고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힘들고 험한 길이라 해도 목표가 있는 도정(道程)은 언제나 즐겁다. 힘껏 노력은 했으나 역부족으로 목표에는 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은 보람이 있다. 인생은 과정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인생의 끝을 내가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그 힘든 길이 차츰 익숙해진다. 견디기 어려운 수도자의 삶이 자신에게는 알 수 없는 기쁨이 되는 것처럼, 처음에는 돌아가고 싶었던 후회가 나중에는 떠나오길 잘했다는 흐뭇함으로 바뀌어 간다. 

추운 겨울에 산에 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이 즐거움으로 변할 수 있는 승화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겨울산은 엄격함을 요구하는 수도원의 규율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보람과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높은 경지의 고행이다.

겨울 산에서 산정에 서면 나는 다시 출발점에 와 있음을 느낀다. 정복이라는 단어를 누가 감히 이 자리에서 쓸 수 있을까. 내가 오른 정상은 또 하나의 시발점일 뿐이다. 언제나 종착지와 시발점은 한 곳에 있는 것. 그러므로 왔으면 떠나야 하고 떠났으면 돌아와야 한다. 

봉정에서 산 너머 산이 있고, 또 그 산 너머 산이 있음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의 끝이 결코 모든 것의 끝이 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성취에 자족하여 안주하기에는 가야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아 있음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산은 언제나 야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함께 겸손을 배우도록 일깨운다. 산은 쉼 없이 도전해 오도록 손짓한다. 그러나 더불어 오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산은 처음과 끝이 하나로 맞닿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작은 성취도 그 가치를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그 하나의 성취가 있음으로 또 다른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까닭에 산의 정상은 그리하여 또 하나의 시발점이나 같다. 그러나 그것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까마득히 먼 최종 목표일뿐이다. 

겨울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다 문득 뒤돌아보니 산은 언제나 그렇듯 그 곳에 서 있다. 다만 그 곳에 서 있다. 다만 그 곳에 오르는 사람들만이 바뀌어져 갈뿐이다. 산은 그저 산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오르는 사람만이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할 뿐이다. 인간보다는 영원한 것이기에 그 앞에서 유한의 가치도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하루는 아침부터 열리고 일 년은 정월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겨울 산에 오면 나는 어제나 다시 시작한다. 새해 아침의 그 경건함을, 그 새로움을, 그 희망을 산은 커다란 가슴으로 품고 있다가 내게 건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해 새 아침에나 진지한 마음으로 만나보는 겸손이나 아름다움도 산은 늘 새롭게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겨울 산에서 아침을 맞고 싶다. 그 눈부시게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면서, 나는 다시금 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리하여 나의 새해를 그 장엄한 겨울 산에서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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