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2 (목) 12:00:00 성민희 소설·수필가
이번 신년회에서는 특히 마음을 울리는 시간이 있었다. 한 언니가 조용히 마이크를 달라더니 두툼한 노트 몇 권을 들고나왔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Gucci 브로치도 선물로 내놓았다. 그것은 한때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얼마 동안 생활비를 대어주었던 동기들과 이런저런 모양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동창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언니가 보여준 노트는 받은 사랑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둔 ‘은혜의 장부’였다.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 준 까마귀처럼, 끊이지 않았던 동창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제 환경은 부유하게 바뀌었지만, 그때 받은 사랑의 순간만큼은 변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다는 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 사이에서 많은 일을 만들어 낸다. 때로는 남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물질로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쁘고 아픈 일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흉터는 시간이 흐르며 옅어진다. 설령 남아 있더라도 다쳤을 당시에 느꼈던 그 날카로운 통증까지 고스란히 재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곰곰 되새길수록 골은 더 깊어지고 선명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마음으로 입은 은혜 또한 물질로 받은 도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긴다. 고난의 시기에 건네받은 따뜻한 눈빛과 정성 어린 말 한마디는 영혼에까지 각인되는 감동이 된다는 사실을 보며 우리는 모두 마음이 뜨거워졌다.
돌아보면 동창들과 함께한 45년의 세월은 좋은 기억을 심고 가꾸어 온 시간이었다. 상처보다 위로를, 시기보다 격려를 나누며 서로의 세월을 지켜 준 우리의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영롱한 보석이 되었다. 내년은 모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친정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노년의 졸업생들은 서로 속삭인다. “내년에는 우리, 친정에 가자.”
<성민희 소설·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