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고 온 금잔화
연초부터 흠뻑 내린 비 때문인지 캘리포니아의 올봄은 일찌감치 만개한 꽃들과 푸릇푸릇한 초목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겨울 동안 잊고 있던 뒷마당의 꽃들이 마치 요술을 부리는 듯 톡 톡 땅을 뚫고 솟아올라 놀라운 기쁨을 안겨주는 요즈음이다. 막 피어오르는 샛노란 튤립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내 학창 시절 추억이 떠오른다.
Y 중학교, 우리는 그 학교의 역사적인 제 1회 신입생이었다. 학교가 외지에 있는 데다, 신축이라 운동장에 나무 한 그루 없이 덩그러니 헐벗은 모습이어서, 추첨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학교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더구나 남녀 공학이라는 사실이 좀 부끄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츰 그런대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여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 후 가장 큰 변화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기하, 대수, 기술 같은 생소한 과목도 접하게 되었지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빨간색 표지에 금발의 소년소녀가 함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영어 교과서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영어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일하시던 작은삼촌 덕분에 외국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쿼바디스>,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화들을 접하며 서구문화에 대한 선망을 키웠다. 특히 나탈리 우드 주연의 <우수 雨愁> 라는 영화에서, 버려진 기찻길 위를 걷는 오프닝과 엔딩 장면은 내 마음의 영상에 아련히 남아 있다.
나의 엄마가 여고 시절 열렬히 좋아했다던 로미오와 줄리엣, 내가 제일 좋아한 사운드 오브 뮤직, 닥터 지바고 등의 영화음악, 대학생 오빠들이 늘 틀곤 하던 언덕 위의 하얀 집, 우울한 사랑 등 감미로운 팝송들을 들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영어 가사를 흉내 내며 따라 부르곤 했다.
나의 첫 영어 선생님은 마흔 초반의 나이에 안경을 쓰시고, 약간의 전라도 억양이 섞인 조용한 어조로 수업을 하던 분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선생님은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이 영국 신사처럼 잘 어울렸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국식 발음을 가르쳤는데, 어린 마음에도 왠지 그 발음이 품격있게 느껴졌다. 그때 처음 길든 발음이 평생 습관이 되었는지, 지금도 남편이 종종 나의 발음을 미국식으로 ‘변환’해서 알아듣곤 한다.
Y 중학교는 지금 생각하면 참 신선한 분위기였다. 학교의 선생님들도 대부분 젊고 참신한 분들이었고, 건물과 책상 등 모든 것들이 새것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미술 선생님이 우리가 오르내리던 계단의 난간에 탁자를 놓고 그 위에 들국화 같은 제철 꽃을 한 아름 꽃병에 꽂아 장식해 놓아두곤 하던 모습이다. 그 꽃은 아직도 내 마음에 환하게 피어있다. 당시 그분은 삼십 대 후반쯤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어느 날 내가 그린 그림을 보시고, “미술에 소질이 있다”라며 격려해주시던 온정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키순으로 번호가 매겨 졌는데 나는 41번, 그리고 42번은 현애였다. 현애는 아주 마른 체격이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혹시 날아가 버릴까 봐 그 애 엄마가 걱정할 정도였다. 지금도 가끔 그 애가 생각날 때가 있다. 참 예쁜 아이였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여인처럼, 갸름하고 가냘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격도 유순하고 다정다감했던 현애, 내가 그 애를 아직도 마음 한구석 간직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와 나의 꽃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무지 같았던 교정에 남학생들은 아기 나무들과 꽃나무를 심고, 여학생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금잔화 한 포기씩을 맡아 잘 가꾸라는 교장선생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건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훌륭한 교육 방법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가르쳐준 진정한 산교육이었다.
현애와 내가 물뿌리개를 들고 그 작은 금잔화를 매일 찾아가 정성껏 돌보아주었다. 그 꽃은 현애처럼 가냘픈 노란 풀꽃이었다. ‘이별의 슬픔’이라는 꽃말을 가진 그 꽃은 어쩌면 우리가 헤어져야 할 운명임을 암시했을지도 모른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내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갑자기 엄마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고, 오빠들은 군대로, 그리고 나와 언니는 작은 집이 있는 고향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정든 금잔화와 현애, 그 밖의 소중한 추억의 대상들을 고스란히 두고 서울을 떠나야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머나먼 이국땅에서, 노랗게 피어오르던 우리의 금잔화를 생각한다. 내가 떠난 후, 현애가 혼자서도 잘 가꿨으리라 믿으며, 이제 금잔화의 황금 물결이 곱게 펼쳐질 그 언덕 위의 교정을 그려본다.
서구 문물에 환상적인 꿈을 가졌던 소녀는, 이제 머나면 이국땅에 살며, 다시 한국적인 것들을 그리워한다. 그건 아마도 회귀본능 같은 것인지, 아니면 이제 모든 것을 보다 성숙한 안목으로 보게 되어서인지.
모든 ‘인연’의 순간은 인생의 소중한 ‘과정’ 같은 것이리라. 나는 지금까지도, 한국의 딸로 태어나 성장한 사실을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모든 과정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