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란다, 보라색이 있는 풍경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니, 자카란다꽃이 밤새 소리도 없이 피어나 있다. 매년 5월이면 피어나는 꽃, 자카란다! 왠지 올해는 소식이 늦어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터라, 반갑기 그지없다. 맑은 하늘 아래 눈 부신 햇살을 받으며, 실바람 따라 넘실대는 고운 보랏빛 꽃 물결과,  잘 조화된 섬세한 푸른 잎새들이 마치 내게 인사하며 이렇게 권유하는 것 같다 - “밤새 안녕! 너도 나처럼, 바람 부는 대로 춤추듯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겠니?”

 

 어려서부터 보라색을 좋아했다. 제비꽃, 도라지꽃, 난초, 들국화(쑥부쟁이), 라일락, 등나무꽃 등, 그리고 이곳 미국에선 바로 저 자카란다의 색깔  -  신비스럽고 우아하며 환상적이지만 어딘가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 것 같은.   

 자카란다의 원산지는 아마존강 유역과 남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인데, 서리가 내리지 않는 아열대 지역에서 주로 가로수나 정원수로 널리 자란다. 높이는 35m 정도이며, 가지가 넓게 퍼져서 풍성한 느낌을 준다. 꽃은 오동나무같이 길쭉한 종같이 생겼다. 색상은 특이하게 청자색이며, 빛에 따라서 파랑~보라색을 넘나든다. 이 자카란다의 꽃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벚꽃이 초봄을 물들인다면, 자카란다는 늦봄을 보랏빛으로 수놓는다. 꽃말은 화사한 행복이고 ‘L.A.의 벚꽃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서재에 앉아, 창 너머로 소담스레 피어오른 그 자태를 마주 본다. 기품 있고 멋스러우면서도, 수수하고 겸허한 중년 여인의 모습 같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만족스럽고 절로 행복해지고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여고 시절, 문예반에 속해 있었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우리는 학교 돌담길을 따라 모두의 작품을 진열하는 시화전을 열었다. 나의 시는 소녀의 기도를 주제로 한 좀은 명상적인 것이었는데, 마침 친구 소개로 어느 미대생 오빠가 내 시의 배경을 그려 주었다. 연보라색 라일락이 몽상적으로 피어 있고, 은은한 빛이 감도는 성모 마리아상이 그려진 멋진 작품이었다. 이민 오면서 그 액자를 두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립고, 다정했던 친구들과 그 작품이 보고 싶어진다. 그 미대생 오빠도 나처럼 이따금, 자기 작품을 생각할까?

 

 엘에이에 처음 와서 살던 처녀 시절, 내게 보라색 원피스 드레스가 있었다. 저 자카란다 빛과 똑같은. 얇고 부드러운 천의 그 원피스를 즐겨 입고 성당에도 가고, 지인의 결혼식과 음악 연주회에도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옷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지만, 다시 한번 입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가지고 있다 한들, 이제 더 이상 내 몸에 맞지는 않겠지만.

 그 시절 사회 초년생으로,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안개 낀 새벽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전혀 알 수 없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외국에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고,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봐야 할 지조차  감을 못 잡은 채, 그때가 바로 황금같이 귀한 내 청춘의 시간이라는 사실 또한 망각한 채, 방황하곤 했다.

 

 그런 내게 미국은 관대했다. 이제 이곳은 제2의 고향 같다. 엘에이 사람들은 대체로 마음이 좋고, 인정이 많은 낙천적인 사람들이다. 이십 대 후반에,  공무원 시험을 치러 시청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엊그제 일 같다.  그날, 난 미련하게 굽이 높고  뾰족한 구두를 신고,  응시자들의 긴 줄을 따라 이동하다가 돌계단에서 발목을 삐어 버렸다. 아픔을 무릅쓰고 시험을 쳤는데, 운 좋게 합격하였다. 그날, 나와 같이 시험을 보러 왔던 타티아나라는 흑인 여성과, 점심도 같이 먹고, 종일 함께 행동했는데, 참으로 친절하게, ‘동양인인 나를 격려해 주며 보살펴 주었던 것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어디서든 잘살고 있길 비는 심정이다.  

 

풀타임으로 일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끝없이 야간 대학에 다녀야 했다. 매일 밤 숙제 하느라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없다. 마침내 소망하던 대학 졸업장을 획득했을 때의 감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내 가냘픈  어깨에서 큰 짐을 내려놓듯, 인생의 한 종지부를 그었다고 할까.    

  

시립 도서관에 취직이 되어 도서관장을 도와 교민을 위한 한국 도서 소장을 위해 노력했다. 동네 신문과 라디오 프로그램( 박인희의 토크쇼)에 초대되어 로스앤젤레스 시립 도서관에서 한국어책을 소장하고 있으니 많은 이용을 바라며, 또한 한국어책을 더 많이 구매하기 위한 모금도 성원해 달라고 부탁도 하였다.

내가 일하던 노스리지 도서관에 밸리 한인 친구들의 정성으로 한국 서적을 더 들여올 수가 있었다. 그들의 가족들이 도서관에서 받은 혜택이 너무 많다며, 그 고마운 마음을 꼭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

시 직원으로 일하는 동안, 내 보잘것없는 이중언어 능력이 로스앤젤레스 교민들의 다양한 업무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다면,  내 평생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돌이켜 보니, 나를 여기로 보낸,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길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반평생 넘는 삶을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이민자의 삶치고는, 비교적 무난하고 평범한 삶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살았다면 더 낭만적이고 재미있는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자식을  낳아 그들이 장성할 때까지 돌보아 주던 시절이 부모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했고, 또한 힘들기도 했던 시간이 아닐까 한다. 이제 그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립하여 잘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나고 보니 어쩌면 인생이 이리도 짧은, 일장춘몽과 같은지? 소녀 시절, 꿈도 많고, 세상은 온통 내가 체험하고 정복해야 할 그 무엇인 것 같았는데, 벌써 이순을 넘긴 나이에 와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고국에서의 아픈 어린 시절이 가끔 억울하고 애석하기도 했다.  , 어른이 되어 타국 땅에서 살아가며, 본의 아니게, 적응을 잘 못해 빚어진 아쉽고 후회되는 일들이 많지만, 이제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린다.  우리는 모두 인생 초보자가 아니던가? 이 지구에 태어나  모든 것이 처음인데, 어떻게 항상 완벽하게만 처신하며 살 수 있었겠나? 젊은 시절, 미숙하고 무지하여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이제 반성하며, 내 탓, 네 탓, 가리지 않고 다 이해하고 덮어주며, 여생을 북돋우며,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

 

또 가끔, 혹은 자주,  그리운 고국으로 날아가  정든 얼굴들도 만나보고, 어릴 적 시장통에서 먹던 거리 음식도 다시 사 먹어 보고 싶고, 고향 산천의 품에서 편히 쉬어 보고도 싶다.

 

나의 벗, 자카란다, 너의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깊은 회상에 잠기게 한다.  먼 아마존 강기슭으로부터, 부는 바람 따라 여기까지 날아와 화사한 행복을 선물하는 너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모쪼록, 이번 계절에도 부디 오래도록 피어, 내 곁에 있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