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하루

 

 휴일 아침, 느긋한 마음으로 하루를 열며 향긋한 아라비카 커피 한 잔 내려 마신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 야생초 무성한 뒷마당, 늘 거기 서있는 정든 나무들이 시야로 들어온다. 아무도 가꾸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넓은 풀밭을, 유리창 밖으로 거저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숨겨진 나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샤워하며 유튜브로 철학 강의를 듣는다. 벌써 수년째 시청하고 있는 방송이다. 강사가 "이 세상은 마치 마음의 V.R. (Virtual Reality, 가상 현실)이 펼쳐진 것과 같다"고 한다.  내 업보대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마치 꿈을 꾸듯, 통째로 나라고도 한다.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머리와 몸을 깨끗이 씻는다. 

 

 둘째가 오늘, 집에 들르겠다는 문자 연락이 왔다. 갑자기 오는 딸을 위하여,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마침, 엊저녁에 해놓은 삼계탕이 있어서 다행이다. 

 까만 셔츠와 바지 차림에 밝은 핑크색 진 재킷을 걸친, 긴 생머리의 둘째 딸이 들어 왔다. 얼굴색이 좋아 보인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항상 포옹한다. 도서관 사서인 그녀는 내가 읽을 책들을 잔뜩 챙겨 왔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양귀자, 공지영 등의 소설도 있다. 젊은 시절, 나 역시 시립 도서관에서 10년 넘게 일했을 때, 매일 저녁 아이들에게 읽힐 책을 한 가방씩 챙겨 오곤 하였다. 이제 그 반대 입장이 되었으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우리는 서로 영혼의 양식 같은  존재인가? 예은 (藝恩), 내가 이름지은 대로, 그녀는 출생과 동시에 예술, 특히 미술을 연마하며 살아왔다. 나는 무엇보다 나의 아이가, 예술의 정수(精髓)를 이해하고 체감하며 사는 사람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우린 부엌 한 귀퉁이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가벼운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눈다. 그녀 직장과 나의 일, 또 앞으로 있을 가족 행사와 여행, 아빠의 당뇨 관리에 관한 것도. 식성이 까다로운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내가 아빠 건강 관리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자,  걱정스런 얼굴로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 놓는다. 

 그녀는 냉장고와 부엌 캐비넷을 속속들이 열어보더니, 혹 아빠에게 좋지 않은 먹거리가 있나 검색하여, 통과 못 한 것들은 모두 압수다. 내가 곁에서 더 철저히 해야 했을 일이지만, 마음이 약해, 평소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차마 매정하게 통제할 수가 없던 차였다.

 그녀는 아빠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손수 만들어 한가득 싸 들고 오기도 한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효녀 배청' 같다고 하면, 어려서 들은 옛날이야기를 기억하고 빙그레 웃곤 한다. 

 

 마침 큰딸이 아마존을 통해 주문해 준 의자가 도착해, 둘째 딸이 그 자리에서 바로 조립해 주었다. 최신형 고급 오피스 의자이다. 내가 좋아하는 엷은 민트색 천으로 덮여 있어 부드럽고 편한 느낌이 든다. 등받이가 유연하게 뒤로 젖혀지기도  하고, 팔걸이의 디자인도 심플하고 멋스럽다. 딸이 투박한 옛 의자를 치우고, 그 자리에 훨씬 가볍고 안락한 새 의자를 놓아 준다. 실은, 장시간 의자에 앉아 일하는 내게 진작 필요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 의자에 앉으면 글도 더 잘 쓰일 것 같아, 즉석에서 그것을 '작가의 의자'라고 이름 지었다.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최고급 의자를 이렇게 덥석 사서 보내준 큰딸은, 역시 사랑이 넘치는 여식이다. 문자로 보내온, "I love you, Mommy"가 그녀의 따스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오후에 예은과 함께 Trader Joe에 갔다. 그녀 대학 시절,  거기서 알바를 한 적이 있어 쇼핑하기에 도움이 된다. 그녀는 아빠에게 좋은 먹거리를 고르기에 바빴고, 나는 그녀에게 사주고 싶은 먹거리 고르기에 바빴다.

 쇼핑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 서로 껴안을 때, 내 원피스 주머니 안의 100불짜리 지폐가 느껴졌다. 기실 그녀에게 주려고 갖고 있던 거였는데, 순간 마음이 변했다. 먹거리를 푸짐하게 사주어 안심되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던 현금이 바닥이 난 상태여서였을까, 혹은 그녀가 사양하는 손사래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였을까. 다음 기회로 미루며 이번 한 주도 잘 보내길 축복하며 그냥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쉬는데, 갑자기 그 지폐 생각이 났다. 벗어 놓은 옷을 찾아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온데간데없다. 어디서 떨어졌나 보다. 아까 우편물 가지러 잠시 나갔을 때, 얕은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넣었다 빼며, 돈을 떨어뜨린 것 같다.  다시 나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돈을 딸에게 오늘 주었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알뜰하고 현명한 그녀가 얼마나 관리를 잘했을까? 다음 기회에 주려고 미루다 그만, 남 좋은 일 시켰다. 

 그 돈에 애착하는 마음을 달래어 본다. 돈이란 원래 돌고 돌아야 하는 것,   순리에 맡기리라. 힘들게 번 돈이긴 하지만, 누구든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 손에 쥐어졌기를, 그 혹은 그녀에게 행운과 소소한 기쁨을 주고, 뭔가  좋은 일에 쓰이길 바란다. 

 

 무엇보다, 부모 걱정을 덜어 주는 믿음직한 두 딸이 고맙다.  나름대로,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청춘을 거친 그들은,  이제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여, 미술 전시회,  음악회, 아트 클래스를  도맡아 개최하는 등,  다양한 예술 형태로 지역 사회에 공헌하는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내 건망증을 조심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경각심이 든다.

 또한, 아직 '도인' 되기란 한참 멀었다는 아득함도. 

 

 그래도 감사한 하루였다. 

오늘도, 서녘 하늘이 황홀하게 물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