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팔월의 태양

 

헬레나 배

 

8월은 태양의 달이다. 반 고흐의 이글대는 황금 들판과 아득한 기다림으로 펼쳐진 해바라기꽃밭, 끝없는 모래 사막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낙타처럼 목마른 계절. 

 

아버지는 8월에 돌아가셨다.  겨우 사십 초반이었던, 내게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성이었다. 큰 키, 곧은 체격, 넓은 이마, 오뚝한 코에 걸친 검은 뿔테 안경의 귀공자 같은 얼굴. 점잖지만 가끔 오빠들과 유도 시험을 보이거나 장난을 치기도 하시던,  흰 셔츠에 멜빵 달린 검은 바지를 즐겨 입으신 모습.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소녀였다. 갑자기 상주가 된 고등학생 큰 오빠는 거친 삼베 두루마기를 입고 두건에 새끼줄까지 두르고 짚신을 신은 채 마당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른 얼굴이 슬픔에 짓눌려 더 작아 보였다.  사람들이 내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다가와 보라고 하였지만 난 보지 않겠다고 하였다. 무서웠다.

 

그 후에 꿈을 꾸었다.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셔서 평소처럼 자신의 병원 사무실 의자에 앉아 계신 모습을 몇 번 꿈에서 보았지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아들이 천당에 가 있을 거로 생각하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여름 방학 중 돌아가셔서 난 방학 숙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그림일기로 그려서 제출하였다. 교실 뒤 벽에 진열되었던 그것을 보러 다른 반 아이들까지  우리 반으로 몰려와 나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관을 둘러싼 모습을 그린 그림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 불쌍하신 나의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기억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가 달걀부침을직접 만들어 햇빛 드는 창가에서 어린 나에게 먹여주시던 모습, 또 어느 날, 우리 학교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를 접종해 주시며 나를 놀라게 했던 일,  나를 품 안에 꼭 껴안고 당신 무릎에 앉혀 가족사진을 찍던 일들, 이런 몇 편의 기억이 아련하게 아직 남아있다.

 

아버지의 일기와 글들은 할머니가 모두 불태워 버렸지만,  그가 생시에 보던 몇 권의 책들과 노랗게 변색한 사진 속에서 그의 친필과 단편적인 글들을 발견하며 그의 영혼의 파편들을 소중히 건져본다. 마침내 당신의 마지막 상념의 결정체는 바로 나의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 眞 진자. 김 진, 당신이 내게 지어준 이름이다.  그래서 나의 이름은 화두가 되어 내 일생을 동행하고 있다.  참 이 곧 빛이요 길(道)이며 생명이 아닐까 하고 아버지가 내게 미처 못하신 말씀을 곰곰이 되뇌어 보기도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쩌다 미국까지 오게 되었고, 이제 내가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아졌다. 매년 8월이면 남은 가족 모두 함께 성당에 모여 김 상문文 알벨토 요셉을 위한 연미사를 바친다. 나는 아버지의 이름도 좋아한다. 날  상, 글월 文 문, 이 두 글자는 내게 철학적 사유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비상한 아버지, 그리고 그의 생이 남겨 놓은 무늬를 따라가며 살피는 것이 내 인생의 할 일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금빛 은총이 성가대의 음악 사이로 사뿐히 퍼져 내리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몸속으로 깊이 파고들며 치유해 주고 있다. 

 

8월에는 저 먼바다에서 빈 배를 타고 나의 섬으로 가고 싶다. 

 

8월에는 작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