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나라

 

 

      오늘 그곳에 다녀왔다. 하얀 양복 정장을 입고,   생전 엄마가 내게 사주었던 미색 머플러를 어깨에 둘렀다.   분홍빛 카네이션과 붉은 장미꽃이 어우러진  꽃다발을 들고,  딸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우리는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노처녀인 그녀에게 결혼 계획을 타진해 보기도 하며

 

      주말인데도 교통이 혼잡해 묘지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보다 5분이 늦었다. 시누님의 딸인 이쁜이와 둘째 아주버님 가족 모두 일찌감치 계셨다. 날씨가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405번 남쪽 프리웨이를 따라가다 커버시티(Culver City)에서 내리니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바로 눈앞에 전개되었다.  푸르른 잔디가 태평양을 바라보며 완만하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딸이 미리 준비해 먹거리를 작은 상에 차려 올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간에 놓았다. 지난번 그녀와  통화 ,  약간의 음식을 준비하면 좋겠다는 의사를 비쳤더니,  손이 그녀가 바로 부근의 한국 식품점에 들러 여러 가지를 사 온 것이었다. 올릴 없어서, 소주와 유과, , 오렌지, 오징어, 몇 가지만 간단히 차려 놓았다.

 

      둘째 아주버님의 아들 먼저 나란히 절을 두 배 올렸다.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 풍습에 익숙하진 않지만, 정성은 과히 갸륵했다. 모두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이제껏 이런 한국식 제사를 생략해 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통적인 제사상을 올려 드리고 싶었다. 향도 피워드리고 싶었지만, 주위 외국인이 염려할까 하여 그만두었다.   손자가 술을 따라 주위에 각각 번씩 부어 드렸다. 그리고 평소 그들을 무척이나 귀여워하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그간의 소식을 아뢰었다. “우리는 이렇게 커서 살아가고 있고, 그간 결혼도 했고, 둘째는 벌써 아기까지 낳았어요.”라며.

 

      다음은,  그들의 아내와 나의 장녀가 함께 수줍게 절을 올렸다. 둘째 조카며느리는 외국인이지만, 셋이 곧잘 맞추었다. 이쁜이는 부지런히 모든 것을 비디오로 찍으며 외조부모님께 해설을 해드렸다. 손자들이 이렇게 핸섬하게 장성했다는 , 손자며느리 둘씩이나 생겼다는 외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셨다면, 어떠한 말씀을 하셨으리라 기억을 더듬어가며 전라도식 사투리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나도 분께 절을 올리며, 그간의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다. 젊어서 미숙했고, 녹녹지 않던 생활 속에서 미처 못다 한 효도를 아쉽게 돌아보았다. 이제 와 생각하니, 인생은 우리 스스로 힘으로 살아온 만은 아닌 같았다. 힘들었던 지난날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고, 강물이 흐르듯, 우린 그저 흘러온 것이었다고. 그러니, 이제 너무 애쓰지 말고, 세월의 흐름에 맡기면 된다고, 두 어른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같았다.

 

      발치 떨어진 곳 아담한 나무 아래, 둘째 시아주버님이 누워 계신다. 평소 몸이 약하던 그는 부모님 가신  수년 , 가족을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형제는  제사상을 다시 자신들의 아버지께 올려 드리고, 석 잔의 술을 부어드렸다. 항상 인자하고 유머  있던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들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아직 고등학생 시절 때였으니, 아버지가 그리운 때가 많았으리라. 이제 늠름하게 자라 어엿한 성인이 모습을 보며, 새삼 그들 어머니 숨은 노고가 느껴졌다.

 

      납골당에 계시는 엄마를 찾아 2 건물에 올랐다연분홍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가 미리 나와 우리를 부르고 계셨다엄마와 형식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딸이 외할머니의 집을 닦아드리고함께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은 음식을 작은 봉지에 담아,  각자 집에 가져가 먹으라고 나누어 주었다. 시조카 둘에게는 소주 씩도. 이런 재회의 기회를 마련해준, 이쁜이가 고맙고 기특했다. 보스턴 칼리지에서 중국사를 전공한 그녀가, 이번 5월을 맞아  돌아가신  친지를 찾아뵙는 의미있는 시간을 내어보자고 제안해와서 모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좋아한다며 마른 오징어채를 각별히 챙겼다.

집에 돌아와,  다른 행사가 있어 참석을 못 한 둘째 딸과 남편에게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었더니, 함께 못 한 것을 애석해 하며,   다시 가자고 했다.

 

      이제껏 차일피일 미루며,  우리 부부의 묘지를 준비 못한 것이 새삼 상기되어,  이제 때가 되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누워 자손이 찾아오기를 기다려 주어야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끔 그들이 찾아와 우리 앞에 작은 상을 차리고, 향을 피우고 (엄마는 향을 좋아해), 오늘처럼 돗자리를 깔고, 오손도손 잠시라도 함께 앉아 있을 있도록. 마지막까지,  오직 그들의 행복만을 위하는 마음에 혼자 피식 웃었다. 

 

       우리는 이제 웃을 있다. 육체의 소멸이 죽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평화와 안식과 지복의 시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사랑이며,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라는 것을,  마침내 감지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