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해

 

                                                                                                                                             헬레나 배

 

 다사다난했던 2011년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어쩐지 쉽지만은 않게 시작했던 한 해였던 것 같아 이제 그 마무리를

하며 좀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것도 같다. 산다는 일이 항상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어서 그저 한 해 무사히 잘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새삼 고마움은 내가 너무 소심해서일까? 여하튼 한 해가 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무엇이든 어떤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래서 향한 곳이 오하이(Ojai, CA)였다. 오하이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북서쪽으로 위치한, 자동차로 약 두 시간 걸리는 지점에 있는데

거기 ‘이 시대의 마지막 현자’라고 불리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95년 5월 ~ 1986년 2월 17일)의 기념관이

있다. 118번 프리웨이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산타 파올라에서 내려 맥도날드에 잠시 들러 휴식하였다. 처음 가는 길이라 조금

아리송한 부분이 있어 어느 남미계의 마음씨 좋게 생긴 중년 남자 분에게 여기에서 오하이를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더니 약도를

그려가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자기는 가스컴퍼니 직원이라서 그 지역을 잘 안다고 했다. 가는 길이 경치가 참 좋고 우리의

목적지인 맥앤드류 로드는 오하이 초입에 있는데 거기는 너무나 고요해서 명상원이 제법 많이 있는 '별천지'라고 귀띔해 주었다. 남편은 그렇게 친절히 가르쳐주는 사람을 보고 감동을 받았는지 “요즈음도 저런 사람이 있다니!” 하며 고마워하였다.

 

 

 노쓰 오하이 로드는 바로 캘리포니아 150번 하이웨이였는데 꼬불꼬불 산길 이었다. 붉은 흙과 바위가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삼림이 울창한 사이를 달리니 마치 유럽의 산길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자연 속의 '매직 마운틴' 같아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마침내 크리슈나무르티 기념관을 찾아 주차를 하고 나니 거기 아담한 집 한 채가 있었다. 호기심을 느끼며 신발을 벗고

들어가 보았다. 마음에 드는 것은 흰색의 벽, 높은 지붕, 그리고 사방에 유리창이 있어 밝은 실내와 어디든 창 밖으로는 푸른

산과 나무가 보이는 점이었다.

 

 

 먼저 도서실의 벽난로 옆 책장으로 가보았다. 크리슈나무르티가 평소 읽던 그의 손때 묻은 책들이 질서 있게 꽂혀 있었다.

브리타니가 백과사전을 위시하여 바가바드기타 등의 고대인도 경전, 플라톤, 칼 융, 그리고 노자와 선(zen)등의 동양사상의

책도 꽤 보였다. 그 옆으로는 그 자신의 저서들이 꽂혀있었는데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것들도 많이 있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완전한 자유>, <생활의 기술> 등외에도 거의 이십 여권의 한국어 번역판이 있는 것을 거기에서 처음 목격하고 내심 놀랐다.

 

 

 중동계의 한 노인이 깊은 침묵에 잠겨 하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젊은 인도 여인이 귀여운 강아지를 데리고 좀 떨어져 앉아

있었다. 라이브러리를 나와 다이닝 룸을 거쳤다. 주로 채식위주의 가볍고 즐거운 식사를 하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생전 모습을

상상하며 메디테이션룸(명상의 방)에 이르렀다. 깨끗하고 감촉 좋은 카펫 위로 크고 푹신한 방석이 나에게 앉아보라 하였다.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깊은 명상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으로는 아주 작은 방이 또 하나 나있었는데 산을 마주보는

밝고 큰 유리창이 있었고 간소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바로 거기가 크리슈나무르티의 주옥같은 저서들의 산실

이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서점에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여러 책과 시청각 자료들을 살펴보고 그의 어록이 담긴 2012 새해 달력을 사 들고 밖으로 나와

언덕을 올랐다. 발밑으로 냉이, 쑥, 질경이, 민들레 등의 봄나물들이 붉은 흙 사이로 자라나고 있었다. 여기는 벌써 봄이 와

있었다. 온통 푸름이다. 언덕 위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뒤로 거대한 오크 트리, 바로 그 ‘명상의 나무’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가 자유와 진리를 명상하던 바로 그 자리 아니던가. 그 자리에 오늘 내가 서 있음이 아이러니하였다. 그가 그렇게 하였듯

나도 그 큰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보았다. 푸른 산이 둥글게 나를 안아주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영혼이 뭉게구름이

되어 파란 하늘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 하늘은 그가 생시에 매일 바라보던 하늘이며 이 산들도, 저기 나뭇가지를 뛰어넘는

다람쥐도, 그때 그대로이리라. 그래, 나 이제 이렇게 '바라보며' 살리라. 이렇게 깊이 숨을 들이켜고 또 내쉬며.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분리했기 때문에 모순이 시작되며 그 모순은 갈등과 고통을

낳는다고. 그래서 우리는 모순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운동이며 총체적인 것이라고. 슬픔과 기쁨, 환희와 절망, 고독과 그것으로 부터의 해방 등이 밀물과 썰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나아가 진실로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지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배우라 하지 않았던가. 이 배움의 과정이 점진적이긴

하지만 시간의 문제는 아니라고. 시간은 다시 분열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나 순식간에 그것의 진리를 이해하면 그것이 -

이러한 행위와 반응,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이 끝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총체적인 것은 이러한 행위와

반응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참으로 위대한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먼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찾아와 길을 묻는 나그네를 인자하게 맞아

준다. 오렌지 나무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라서 그런지 스치는 바람마저 향기롭고 감미롭다. 녹색의

장원을 이리저리 산책하다 보니 흰색의 목조로 된 이층집이 나온다. 일본계로 보이는 상냥한 아가씨가 리트릿하우스(피정의

집)로 안내해 주었다. 이 집 역시 유리창이 많이 달린 아름다운 방들이 열 개인가 있고 베드엔 브랙퍼스트(침실과 아침 식사)

를 적당한 가격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바로 이 집의 이층 방이 내가 사진에서 본, 하늘을 배경으로 창가에 선

위대한 철학자의 노년의 모습이 찍혔던 곳이었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더 빠르고 쉽다. 크리슈나무르티 기념관을 뒤로 하며 우리는 다시 새해를 맞으러 집으로 돌아온다.

2012년, 이 해에는 우주의 기운에 큰 변화가 일어나 인류에게 영적, 종교적인 진화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여, 흑룡의 해여, 올해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의 영성이 새로 깨어나기를 희망한다,‘영성’만이 살 길인 것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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