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로서의 자의식 / 여세주
1.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이유로 4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순전한 이기심(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미학적 열정(예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은 열정), 역사적 충동(진실을 알아내어 보존해 두려는 욕구), 정치적 목적(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구)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들 가운데 어떤 동기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는지요?
어떤 경우이든, 창작 동기가 없으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창작 동기가 크면 클수록 글을 쓰고 싶은 열정이 생기겠지요. 가슴속에 잠재해 있는 열정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쳐 나올 때 집필을 해야 진정성 있는 명문이 나옵니다. 수필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기표현 욕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수필은 대부분 작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일기를 쓰듯이 쓴 글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경험을 미학적으로 구성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글쓰기가 수필이지요. 비록 순전히 인정욕구 때문에 수필을 쓴다고 하더라도, 작품 자체는 예술성과 문학성을 갖추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문학작품이라기에는 부끄러운 잡문을 쓰면서도 수필가입네 자처하고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질타에서 저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말씀드립니다. 수필문단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런 허세가 수필문학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여겨집니다. 타고난 글재주를 지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 습작이나 오랜 수련을 거치지도 않았는데, 수필가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수필가들이 많은 탓입니다. 이런 이들 때문에 수필가 전체가 무시당하고 푸대접 받고 하향 평가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지요. 수필 창작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등단을 하겠답시고 어설픈 작품은 내미는 사람들과 창작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이들의 등단을 경쟁적으로 부추긴 잡지사들의 후안무치가 빚어낸 적폐입니다. 잡지의 출판비나 원고료 등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잡지사의 변명을 충분히 이해하고 너그럽게 용납한다 하더라도, 등단 대상자의 문학적 자질은 반드시 검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박사과정 진학 문제를 상의하려고 어느 교수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공부는 좀 하느냐”고 물었지요. 공부를 한답시고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이며 계면쩍게 웃기만 했지요. 그러자, 교수님께서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공부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거든, 굳이 학문 하겠노라 애쓰지 말고 마음 편하게 살아라.” 이 충고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귓전에 맴돌았습니다. 공부를 해야 마음이 편안한지, 내팽개치고 놀아야 마음이 편안한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생각을 뒤집곤 했습니다.
수필쓰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을 쓰지 않아도, 그리고 수필을 쓰기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다면 굳이 수필 쓰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지요. 진정한 작가들이 글쓰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글을 쓰지 않고 있으면 마음이 왠지 불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을 쓰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면, 글쓰기의 고통 속에 자신을 던질 이유가 없겠지요.
글쓰기에는 희열보다 고통이 더 따르는 법입니다. 작가로서의 진정한 자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고 또 글을 쓸 때마다 그 고통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예술가로서, 문학인으로서, 수필가로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자부심을 지키려면, 글쓰기가 두렵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몸살을 앓는 작가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치열하게 글쓰기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적 주체로 여러 사람 앞에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으려면.
자신의 글이나 자질에 대한 불만족으로 글쓰기에 대한 회의懷疑에 빠져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을 쓰면서 힘겹고 고통스럽기만 한데, 이 끔찍한 일을 내가 왜 찾아서 하지?’ 이처럼 스스로에게 불만을 터뜨리곤 하지요.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의심해 보는 이라면, 그나마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의식을 지닌 분들입니다.
3. 등단이란 비로소 글이란 것을 써 보려는 이들에게 허용하는 통과의례일 뿐입니다. 본격적인 문학 창작과 이를 위한 공부를 시작한다는 선포식 정도로 여기면 좋을 것입니다. 등단은 문학 활동을 위한 입문일 뿐이지요. 비로소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제부터 창작에 매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작품을 쓰려면 먼저 작품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쓰는 것만큼 읽는 것도 중요하지요. 쓰지 않을 때는 읽고 있어야 합니다. 작품을 두루 읽으면서 전범典範이 될 만한 것을 참고삼아 많이 써야 합니다. 그렇게 쓴 작품들 가운데는 스스로에게조차 만족스럽지 못하여 버려야 할 작품도 있고, 예상 외로 괜찮은 작품도 태어날 때도 있습니다. 갑자기 장인정신이 투철한 도공이 생각나네요. 도자기를 한 가마 가득 구워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부분을 깨어 버린다지요? 구워낸 도자기는 다시 수정할 수 없으니, 글과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글은 수없이 수정하고 다듬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애초부터 시원찮은 글은 아무리 다듬어도 환골탈태하기 어렵습니다. 과감히 버릴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수필문단에는 수많은 동인회가 있습니다. 각 동인회마다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연간 수필집을 발간합니다. 그런데 상당수 회원들이 평소에 써 놓은 작품이 없어서 원고 마감일에 맞춰 부랴부랴 작품을 쓰거나 그것조차 하지 못해서 작품을 제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수필가라는 명함은 잘도 내밀면서 일 년에 한번 발간하는 동인지에 낼 작품이 없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평소에 작품 창작이 습관화되어야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작을 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결실을 얻을 수 없듯이, 작가도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대학원을 다닐 때, 어떤 선배가 근로기준법에 따라 하루에 적어도 8시간씩은 공부해야 한다고 하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노동자들이 근로시간을 지키며 일하듯이, 공부하는 데에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자는 말이었지요. 글을 쓰는 데에도 운동선수들만큼 노력하면 어떨까요? 기초 체력을 다지는 훈련에다가 실전에 대비한 기술을 하루도 그르지 않고 연마하잖아요? 전업 작가가 아니라 취미생활로 문학을 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항변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취미활동으로 문학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위해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겠지요.
열심히 쓰지 않고 명작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많이 쓰기만 하면 명작 몇 편을 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죠. 문학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문학적 자아를 형성하고 문학적 자질을 쌓아가야 합니다. 문학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다잡지 못하면 훌륭한 작품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창작의 주체로 인정하고 그것에 값할 만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부단히 관찰하고 사색을 해야겠지요. 사물의 이치와 삶의 새로운 측면을 이해할 때까지 치열하게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남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명작은 바로 그 순간에 탄생합니다.
작품 창작을 하면서 전범을 뒤쫓아 가다가 어느 순간에 새로운 단계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그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관습적 규약에 지나치게 고착될 필요가 없습니다. 장르적 규약조차 과감히 해체해 볼 필요도 있지요. 장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수필의 규약에 꼭 들어맞아야 하는가, 좀 벗어나면 수필이 아닌가, 남들이 모두 저렇게 쓰는데, 나는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 이런 실험정신을 가지고 수필의 형식 미학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실험적인 창작 정신이 있어야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4. 수필 창작을 하는 데에도 문학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수필에 대한 공부는 물론이고, 문학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하지요. 이런 말을 하면 “작품만 잘쓰면 되지, 무슨 공부를 하라는 거야”라고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습니다. 터무니없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작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한계에 부딪치기가 일쑤입니다. 창작 방법의 한계에 부딪치기도 하고 세계관의 한계를 느낄 때도 있겠지요.
그런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문학적 지식입니다. 작가에게 문학에 관한 지식은 체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 창작 공부가 다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문학원론, 문학사, 비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논문을 쓰고 비평을 쓰는 이들에게만 문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수필가도 수필창작론이나 수필론을 공부해야 수필관을 확립할 수 있는 겁니다. 영역을 더 넓혀서 다른 장르의 창작론이나 문학원론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문학관을 확립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수필 창작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 수필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는 문학이론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수필 쓰기를 그만두는 날까지 고뇌해야 할 과제입니다. 수필문학에 대한 어떤 신념이 없이는 진정한 수필을 탄생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수필관, 어떤 문학관에 바탕을 두고 작품을 창작하고 있는지요?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필이 반드시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하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떤 문학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문학의 인식적 기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라면, 수필은 반드시 어떤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고 봅니다. 반대로 언어 자체의 육감적 아름다움이나 서사적 흥미로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문학은 그 기능을 다한다는 입장이라면, 굳이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수필관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일반적인 수필관은 어떤 메시지를 담아내는 수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머문다면,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요.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면 잡문으로 치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어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내용의 흥미로움만을 추구하며 감동을 주려고 하는 수필을 수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횔덜린은 예술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수공 기술과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술 창작활동에서도 기술을 익혀 숙달하듯이 이론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과 적용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문학원론과 문학창작론, 수필론과 수필창작론에 대한 지식은 창작을 위한 최후방 보급부대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문학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도 알아야 앞으로 흘러갈 방향을 종잡을 수 있답니다. 비평(평론)도 읽어야 합니다. 수필비평에서 창작 방법이나 방향, 창작 방법의 한계, 수필문학의 동향 등에 대해 지침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관을 확립하거나 세계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나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진정 자의식을 가진 수필가라고 자부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지 한번쯤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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