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목 / 최명임 - 2024 경북이야기보따리수기 공모전 대상

 

 

이날을 위하여 몇 생이나 거쳐 왔을까. 오동의 현신을 눈으로 어루만진다. 열두 현을 퉁기니 하르르 피어나는 만상의 소리, 강물처럼 흘러간다. 뉘 가슴 어드메를 건드려 파문을 일으키려고….

 

경북 고령에 있는 우륵박물관을 찾았다. 소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 먹먹한 가슴으로 역사의 장을 돌아보았다. 해설사가 뒤꼍에도 꼭 들러보고 가란다. 우륵박물관 뒤꼍에 염천 불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곳에 오동목이 개개의 판목으로 나뉘어 나른하게 늘어서 있다. 서른 즈음에 불려 왔다는 오동목이 하오의 땡볕 아래서 진을 빼고 있다. 일 년 차는 빳빳하게 서서 눈으로만 투덜투덜, 애송이 곁에 삼 년 차가 가탈 부린다. 오 년 차는 그들을 바라보며 싱긋이 웃는다.

 

오동나무는 본디 목질이 가볍고 홍백색 고운 살결을 지녔지만, 물성이 꼿꼿해서 섣불리 휘어지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마음을 조아리고, 산부리를 아우를 듯 가지를 낸다. 이파리는 사람의 심장 꼴로 빚어서 너붓하게 펼쳐놓는다. 만질만질한 이파리 뒤를 들추어보면 별 모양의 솜털이 눈꽃처럼 서려 있다. 별스러운 꿈이라도 꾸는 양 생생한 잎파랑이 사이사이로 보랏빛 오동꽃을 피운다.

쏟아지는 빛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뱉으며 우듬지로 숨길을 뚫는다. 몇 천 년을 산다 해도 오동을 면치 못하면 여느 나무와 다르랴. 바람소리와 빗소리 온갖 숨탄것들의 소리를 모아들여 저의 소리를 빚어낸다. 봉황은 상서롭다고 여겨 오동에만 둥지를 틀고 장인은 오동만 찾아 산야를 헤맨다.

 

어찌어찌 찾은 재목이라도 푸른 계절엔 함부로 거두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고뇌하는 계절을 지켜보다가 눈에 든 오동을 징발한다. 한 삼십 년 너볏하게 자라 수세가 왕성한 오동이면 족하지만, 바위틈을 뚫느라 마디게 자라서 열매까지 풍성하게 달았다면 비할 데 없는 귀목이다. 옹이는 고통을 이기려고 온몸으로 울어댄 흔적일 터, 훈장처럼 달고 있다.

생목이 일순간 꺾였다고 저를 포기하겠는가. 치열하게 갖춘 물성이면 집착 또한 만만치 않을 텐데. 끈끈한 생명력을 붙들고 몸부림친다. 장인은 전라의 몸뚱이를 판목으로 갈라 세워놓고 수천 날을 한뎃잠을 재운다. 빗물이 살 속을 후벼 파고 염천화염이 묵비로 내리친다. “버려라, 버려라.” 북풍한설의 뼈 때리는 회초리를 감당하며 오륙년을 나야만 진이 다 빠져나간다.

지금까지 다스림은 서설에 불과하다. 장인이 날 선 기구를 들고 말없이 그를 내려다본다. 살풍경스럽다. 수직을 고집하던 오동이 바닥에 눕는다. 수평을 발판으로 다시 등천을 꿈꾸는 것일까. 장인이 그 몸판에 넉 자 반 가야금의 본을 뜬다. 톱날에 물린 채 댕강댕강 잘려 나가는 무용한 살점들 아야, 소리도 못하고 오동은 가얏고의 형상으로 탈바꿈한다.

 

뒤미처 서슬 퍼런 대패가 살을 에인다. 살을 깎는 아픔이라 신음하는가, 대패 날에 썰려 나온 종이짝 같은 살피들이 파르르 오그라든다. 결 따라 다스려야 소리를 허락할 터, 목성이 강한 부분은 얇게 무른 데는 살을 두껍게 저민다. 오동이 가벼이 제 속을 드러내랴. 장인이 하심下心으로 등을 굽혀 소리의 촉수를 건드린다. 그의 등에서 누액 같은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쇠붙이로 오동의 속을 파내고 울림통을 만든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핏물이 장인의 얼굴과 옷자락으로 튄다. 소리의 울림은 울림통에 달려 있다. 오동은 본디 세포벽이 얇고 세포 사이가 성글어 소리를 담기엔 제격이다. 홍백으로 짠 섬유질 사이사이 남겨 둔 여백은 곧은 중에도 은근함일 터. 오동은 애초 자연이 소리를 위해 준비해 둔 목부木夫였는지도 모른다. 소리를 담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울림통이 소리를 먹어버리는 날엔 낭패이므로. 오동의 소리를 불러내는 연금술사 그만이 장인이 된다.

 

잉걸불이 타닥타닥 불꽃이 핀다. 인두가 벌겋게 불을 머금고 오동의 몸에 불꽃을 뱉는다. 화르르 살타는 연기에 몸이 요동칠 법도 하련만, 되레 불꽃이 놀라 흔들린다. 진액 한 점이 어디 고집스레 남았었나, 불질에 파쇄 음을 내고 오동이란 이름이 하얗게 증발한다. 불이 스민 자리마다 색이 사뭇 깊어지고 다져진 몸에 불꽃같은 무늬와 결이 도드라진다.

만곡의 자세로 순응하는 오동, 장인이 두 손가락으로 등을 톡톡 두드려 소리를 불러 본다. 돌괘와 안족, 운족과 현침 등을 자리에 앉힌다. 현을 걸어 기러기발에 올려놓으면 열두 현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가야금 만곡의 등은 하늘이요 아래 받침은 땅이다. 그 가운데 울림통은 인간 세계이다. 사람은 땅을 발판으로 삼아 등천을 꿈꾸는 동물이 아닌가. 사람과 그의 축생들과 미물들까지 열두 달 굽이쳐 울어 예면 하늘이 감응한다. 그 곡절 가얏고가 끌어안고 서리서리 풀어낸다.

 

오동을 다스릴 때 이천 번 손이 간다. 오동이 이천 번을 울어야만 가얏고가 된다는 말이다. 눈물 흔한 내가 작정하고 이천 날을 울어댄다고 소리가 나올까. 만 번을 울어예도 비틀리거나 갈라지거나 주저하는 인간의 소리. 천만 날 살을 깎고 뼈를 다듬는 자, 제 안의 천성을 불러내면 그 소리 오동과 다르랴.

 

우륵 선생이 가얏고를 만들어 소리를 다스릴 때 마을 사람들은 해종일 오동의 정정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정정골(가얏고 마을)이 생겨난 배경이다. 에밀레종이 ‘에밀레~ 에밀레~’ 하고 울었다면 가얏고는 정정골 사람들의 귀에 ‘오야동동~ 오야동동~’ 하고 울었을 것만 같다.

 

인간과 오동은 본디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자연물이다. 사는 것이 그리 녹록했을라. 필경 소리방도 같은 주파수일 거다. 둘이서 판 벌여놓고 한바탕 한풀이한다. 사람이 꺼이꺼이 사설 늘어놓으면 오동은 제 울림통에 고스란히 쓸어 담고 열두 현은 농현으로 풀어낸다. 오동이 소리 내어 울어 준다. 제 설움에 겨워 저도 울어 옌다. 그렇게 인간은 저를 찾아가고 오동은 명금으로 거듭난다.

 

명금이라 하여도 소리하기 전에 어김없이 치음을 한다. 다 갖추었다고 완벽한 것이 아니다. 행여 교만이 허물이 될까 봐 명인이 섬섬옥수로 소리를 불러 다스름한다. 드디어 오동이 수평을 딛고 일어선다. “두둥두둥 덩기당기, 다당따당~” 소리는 능동태가 아닌가! 허공을 비집고 올라 월하의 잠잠을 깨운다. 바람을 몰아세우고 바람을 재우고, 어둠 속에서 별을 캐고, 별을 물고 내려와 산부리를 아우른다. 숲을 거닐다가 이슬 흠뻑 젖어들더니 만인의 가슴으로 여울진다.

 

영 가시지 않는 여음이 귓전을 울린다. 정정골을 울리던 아리아리한 그 울림….

“오야동동, 오야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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