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에서 쓰다 / 허정애 -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남편의 등 뒤로 바람이 분다. 먼 서역을 지나, 뜨거운 고비 사막을 넘어 불어온 황사는 남편의 뒷모습을 점묘화처럼 보이게 한다. 입속 가득한 모래 알갱이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이번 생(生) 같다. 그러나 모래바람에 눈 못 뜨는 사람이 어디 남편뿐이랴. 석굴암 12 나한도 밥그릇을 들고 화강암 속, 흰 듯 번듯한 길 위에 서 있다. 석굴암 유리 벽 안으로는 신라 천 년의 낯익은 바람이 불고, 세상의 소리를 보는 관세음보살은 옷고름을 바람에 나부끼며 정면을 응시한다. 본존불은 원만하시어 "괜찮다, 다 괜찮다."라며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이끼까지도 옷이라 여기시더라.

남편은 어언 구순을 맞았다. 1930년대에 태어났으니, 불행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를 모두 통과해 온 셈이다. 시아버지는 몰락한 양반이었다. 친지 한 분이 보다못해 "밭을 줄 테니까 무어든 지어 먹어라." 해도 "양반은 굶어 죽어도 제 손발을 놀려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다."라며 그 친지를 고래고래 욕하던 분이라 한다. 그래서 생계는 모두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시어머니는 낮에는 남의 집 일을 다니시고, 밤에는 남의 옷을 지어 살림을 꾸려나가셨다고 한다.

남편은 맷돌만 보면 가슴이 저리다고 했다. 어머니가 일 나가신 부잣집에는 대문을 열면 하나같이 축담 옆에 맷돌이 있었고, 어머니는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눈먼 당나귀처럼 어처구니를 돌리고 또 돌렸다고 한다. 해가 질 때까지 어머니는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하여 그 집일을 마쳤다고 한다. 대문 바깥에서 기다리는 막내아들을 생각해서 어서 빨리 일을 마치고자 어머니는 애가 탔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기다리며, 어린 남편은 절대로 불효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나룻배를 건너야 집에 오는데, 남편은 배를 기다리다 얼굴이 시퍼레지면,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벼 발갛게 만들어서 집으로 갔다 한다. 시퍼렇게 언 아들의 두 뺨을 보고 마음 상할까 봐 남편이 낸 묘안이었다. 다시 봄이 올 때까지 하굣길, 남편의 볼 비비기는 계속되었다.

남편은 경찰이 되었다. 시련 속에서도 남편은 끝까지 이상주의자였다. 돈보다 명예가 중요하고, 명예보다 학문이 더 중요하다고 아이들을 교육했다. 그때는 책을 월부로 들여놓을 수 있어서 백과사전과 위인전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었다. 백과사전은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였다. 다음 책이 나올 때까지 심심함을 견디라는 남편의 선물이었다. 더는 읽을 책이 없으면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와서 읽는 활자 중독인 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나는 백과사전을 통해 곤충의 생활을, 아름다운 꿀벌의 춤을, 나비의 엷은 날갯짓을 배웠다. 꿀이 있는 곳을 발견하면 춤을 추어서 동료들에게 알리는 꿀벌들의 군무(群舞)가 어떤 의미인가를 알 수 있었다. 토요일 오후면, 우리집 마루에는 오직 책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고유한 뜨거움을 언제 또다시 만날까?

"아주머니가 누구신지는 몰라도 매양 밥상을 차려 주시니 고맙습니다."

나는 갈치살을 발라 남편 숟가락 위에 얹었다. 갈매기 같은 남편 눈썹의 흉터가 움틀 거리며 와락 숟가락을 삼킨다. 남아 있는 거라곤 맹렬한 식욕뿐이라 해도, 남편은 맛있게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석굴암을 쳐다보는 남편의 눈빛이 문득 서늘하다. 잠깐 정신이 돌아온 듯한 남편의 눈에 사락사락 눈물이 내린다.

"날 여기 내버리고 가라. 어서 가라. 남들 보기 전에 빨리 가라."

나는 남편을 붙잡고 속울음이 터졌다. 그러나 남편은 이내 딴사람이 되어 먹을 것 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적어도 남편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정신이 돌아왔을 때보다, 정신을 놓은 지금 이 순간이 차라리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아름다워 풍경을 하나 샀다. 남편은 풍경을 손에 들고 흔들며 저 앞으로 걸어간다. 그의 등 뒤로 바람이 분다. 먼 서역을 지나, 뜨거운 고비 사막을 넘어 불어온 황사는 남편의 뒷모습을 점묘화처럼 보이게 한다. 입속 가득한 모래 알갱이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이번 생 같다.

그러니 마땅히 살아내어야 해서 사바세계라고 부처는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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