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절기 가운데서

                                                                                                                                                          이희숙

 

 

나는 추석을 한가위라고 즐겨 부른다. ‘은 크고 가득하며 가위는 가운데라는 의미다. 결실하는 계절의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일 년 중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인 추석을 부르는 순수한 우리 말이다. 풍성하게 거두어들이는 추수 절기에 걸맞은 단어라 생각한다. 넉넉하다는 낱말이 마음에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름달이 꽉 차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밝은 빛 뒤에 서린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다. 내 마음을 반영시킨 걸까? 어릴 적엔 달나라 계수나무라며 환상을 그렸는데, 나이 탓인가? 타국에서 이미 사십 년 가까이 바라보던 달인데. 새삼스레 고향 보름달과 겹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식탁에 마주 앉은 건 우리 내외뿐이었다. 으레 일상이건만 오늘따라 그냥 지나치기 서운해 식사를 마친 후에서야 큰딸에게 전화했다. “저녁에 집에 와서 맛있는 거 함께 먹을래?”라는 물음에 오늘이 무슨 날인데?” 갑작스러운 엄마의 초대에 생뚱맞다는 반응을 보였다. 꽉 짜여 바쁜 일정 때문에 올 수 없다고 했다. 타 문화권 남편과 살면서 직장에서 일하고 자녀들 돌보는 것이 벅찰 텐데, 하물며 음력으로 표기된 추석을 기억할 리 없을 터. 하는 수 없이 딸과 손주 일정에 맞추어 추석 잔치는 토요일로 미루었다.

 

쓰지 않던 그리움이란 단어를 이럴 때 쓰는가 보다. 그동안 타국에서 부딪히며 적응하느라 뒤돌아볼 틈이 없었으니까. 비어 있는 자리가 선명히 보인다. 그 주인공인 시부모님, 친정엄마 산소에도 가야 할 텐데. 서늘한 바람이 후비고 간 것 같은 가슴을 달래려 전화기를 들었다. 일부러 낭랑한 목소리로 동생들에게 안부를 물어보았다. 목멘 목소리로 응답하던 부모님은 안 계신 지 오래다.

 

자연은 어김없이 계절을 이끌고 간다. 그와 어우러진 명절 속에서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결실하는 풍요로운 시기를 맞아 햇곡식으로 떡과 음식을 만들고 햇과일과 함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성묘하는 절기가 아니던가. 고향을 떠났다고 조상의 얼을 잊은 건 아니다.

 

앞뜰 나무에 매달린 대추와 감을 바라보며 자작 시를 읊조려본다.

-생략- 하늘을 향해 잉태한 생명/ 햇볕과 바람의 노래가 얹히고/ 마침내 붉은 결실로 가득 찼어요/ 견뎌낸 고통이 아무리 길어도/그 끝에는 보람이 달리고/ 마음을 채우고 영혼을 충만케 하네요

어머니는 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고된 생활 가운데서/ 때로는 비바람에 흔들리고/ 뜨거운 태양 아래 지쳤지만/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곳에는/ 소중함이 맺혔죠/ 다섯 그루 남매는 나름대로 충실하게 자라/ 또 작은 나무에 열매를 매달게 했죠

나뭇가지가 휘도록 달린 대추가/ 붉은빛을 더해가네요/ 온 집안이 불그스레 물들면 어머니는 이웃에게 넉넉한 기쁨을 나누고/ 우리는 붉은 사랑을 한아름씩 안았죠/ 수년이 지난 올 한가위에도/ 어머니의 웃음이 대추나무에 걸려/ 우리 집 뜰에 가득 차고 있어요

명절을 통해 만남에서 얻는 기쁨은 크다. 달이 차오를수록 그리움은 깊어지고, 먼 곳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생각난다. 함께할 수 없는 시간과 거리가 더 애틋하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보다. 온 가족이 모여 웃음 피우던 풍경 속 따스한 여유가 아직 남아 있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만나지 못한 시간만큼 더 크게 애타는 마음이 밀려온다.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지만, 그리움은 내일로 이어져 다시 가슴속에 자리한다.

 

엄마, 어릴 적 만들어 먹었던 일이 생각나서 Moon Cake 사 왔어요.”

늦은 저녁 시간 퇴근하는 둘째 딸이 봉지를 내민다. 바로 추억의 송편이다. 그땐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여러 모양으로 솜씨 내어 만들었다, 그중 울퉁불퉁한 건 막내 것, 햅쌀을 반죽해 반달 모양으로 빚어 넣는 송편 소는 기쁨 그 자체였다. 솔잎을 깔고 쪄내면 하얀 수증기를 타고 향긋한 솔 내가 집안에 퍼졌다. 고소 달콤한 깨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송편에선 소나무 향을 닮은 엄마 손맛이 묻어났다.

한가위 달빛은 우리네 마음 구석구석에 차오르는 밝은 기운을 발하고 있다.